전혀 다른 ‘스포츠 DNA’ 가진 Z세대가 왔다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01 14:00
  • 호수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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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수영 보여준 황선우, 탁구 재미 선사한 신유빈
‘즐기는 스포츠’로 新바람 부르고 新기록 세운다

“파이팅!”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 17세 김제덕의 외침이 일본 유메노시마 양궁장 곳곳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김제덕은 수시로 ‘파이팅’을 외쳤다.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우렁찼다.

단체전 준결승 일본전이 백미였다. 수시로 ‘파이팅’을 외치면서 나이 차가 큰 동료 오진혁(40), 김우진(29)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줬다. 젊음, 그리고 열정. 남자 양궁을 중계하던 외국 방송사 캐스터까지 “저렇게 열정적인 젊은이를 본 적이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김제덕은 분명 이전의 대표팀 선수들과는 달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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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궁 신예 김제덕이 외친 “파이팅”의 의미

초등학교 3학년 때 양궁을 시작한 김제덕은 어릴 적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2016년 전국소년체육대회 3관왕에 오르며 이름을 알렸다. TV 프로그램 ‘영재발굴단’에서는 중국 고등학생 선수와 맞붙어 마지막 화살을 10점 정중앙에 쏘기도 했다. 낙천적이면서 꼼꼼한 성격이 양궁과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이번 도쿄올림픽에는 출전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2019년 어깨 부상으로 2020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도쿄올림픽이 연기되면서 선발전이 다시 열렸고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았다. 2021년 아시안컵이 김제덕이 참가한 첫 성인 국제대회였는데 개인전에서 김우진을 꺾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도쿄올림픽 양궁 경기 첫날 랭킹라운드에서는 거침없이 화살을 쏘아 1위를 차지하며 혼성 단체전에 나갈 기회를 잡았다. 경기를 치를수록 점점 담대해졌다. 김제덕은 안산(20·광주여대)과 짝을 이룬 혼성전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역대 한국 남자 양궁 최연소 메달리스트가 됐다.

김제덕이 ‘파이팅’을 목청껏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방에 대한 기선 제압 의미인가 싶지만, 아니다. 올림픽 무대의 중압감을 떨쳐내기 위해 만든 그만의 루틴이다. 선수촌 특별훈련 때부터 의도적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평소 훈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루 13~14시간 동안 활을 쐈다. ‘파이팅’은 그의 완벽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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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되새김질한 안산

혼성전에서 김제덕과 같이 메달을 딴 또 다른 Z세대, 안산도 주목된다. 경기 때 김제덕이 ‘불(火)’이었다면 안산은 ‘물(水)’이었다. 안산은 포커페이스가 강점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상대의 기를 죽이곤 한다. 류수정 양궁 대표팀 감독은 “외국 선수들이 안산을 보면 겁을 먹고 심리적으로 눌리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만큼 침착하고 냉정하게 화살을 쏜다.

‘산’이라는 이름은 부모님이 뜻하는 바에 의해 지어졌다. 언니의 이름이 ‘솔’, 남동생 이름이 ‘결’(바람)이다. 삼남매의 이름은 합하면 ‘소나무 산에 부는 바람’이라는 뜻이 된다. 안산은 그 이름 그대로 양궁 여자 대표팀의 ‘산’이 됐다.

안산은 다니던 초등학교에 양궁부가 처음 생겼을 때 양궁에 입문했다. 첫 1년간은 자세를 잡고 활 당기기 연습만 했다. 기본기를 제대로 배운 셈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국내 무대를 주름잡기 시작했다. 중3 때 문화체육부장관기에서 전 종목 우승(6관왕)을 차지했다.

도쿄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은 간신히 통과했다. 가까스로 태극 마크를 달았기 때문에 강채영, 장민희 ‘언니들’보다 상대적으로 관심도 덜 받았다. 하지만 특유의 차분함으로 혼성전에 이어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안산은 경기 전후에 긍정적인 혼잣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가 이번 대회에서 읊조린 말은 “잘해 왔고, 잘하고 있고, 잘할 수 있다”였다. 그의 주문대로 안산은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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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영 새 아이콘 황선우의 당당한 질주

황선우(18·서울체고)는 수영 자유형 200m 결승에서 170m를 1위로 역영하다가 마지막 30m를 남겨놓고 7위로 미끄러졌다. 모두가 아쉬워하고 있을 때 그는 웃었다. “완주해서 후련하다”면서 “150m까지 페이스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버 페이스가 걸려서 마지막 50m 후반에 뒤처졌다. 아쉽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상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 그것도 올림픽 첫 출전 경기에서 아깝게 메달을 놓쳐 기운이 빠질 만도 했건만 오후에 곧바로 100m 예선전에 출전해 한국기록을 갈아치웠다. 47초97로 두 달 전 박태환 기록을 넘어서며 새롭게 작성했던 한국신기록을 다시 단축했다. 이튿날에는 아시아신기록까지 넘어서면서 한국 수영선수 최초로 올림픽 자유형 100m 결선에 올랐다. 결선에서는 5위를 기록하며 아시아 수영 단거리의 희망이 됐다.

황선우의 등장은 한국 수영계에 그저 반갑다. 2008 베이징올림픽, 2012 런던올림픽 때 금메달 1개, 은메달 3개를 따냈던 박태환이 은퇴한 뒤 ‘포스트 박태환’을 기다려왔던 터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황선우’라는 희망이 등장했다. 게다가 등장하자마자 박태환의 기록들을 도장깨기 하듯 넘어서고 있다.

황선우의 키는 186cm, 몸무게는 74kg이다. 윙스팬(두 팔을 벌린 거리)은 193cm. 박태환과 얼추 비슷한 체형(키 183cm, 몸무게 74kg, 윙스팬 196cm)이다. 하지만 박태환이 중장거리 선수로 자유형 400m가 주종목이었다면 황선우는 단거리 전문으로 자유형 200m 전문이다. 황선우가 ‘제2의 박태환’이 아닌 ‘제1의 황선우’인 이유다.

황선우의 최대 장점은 수영, 그 자체를 재밌게 즐긴다는 것이다. 혼자서 수영 관련 영상을 찾아 계속 돌려보고 자신의 단점을 분석해 종국에는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한다. 성장 가능성이 무한한 그의 손끝에서 얼마나 많은 신기록이 작성될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100m, 200m는 자기 기록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김제덕, 안산, 황선우 등과 함께 도쿄올림픽 초반을 달군 선수 중 한 명은 탁구의 신유빈(17·대한항공)이었다. 신유빈은 여자단식 2라운드(64강전)에서 룩셈부르크의 니샤롄(58)과 41세 차이가 나는 대결을 선보였다. 제자리에서 별다른 움직임 없이 공을 넘기는 베테랑 니샤롄을 상대하는 ‘신성’ 신유빈의 모습을 시민들은 흥미롭게 지켜봤다. 상대의 변칙 공격에 다소 밀리던 신유빈은 이후 제 페이스를 찾으며 승리했다. 비록 32강전에서 탈락해 눈물을 쏟아내기는 했으나 신유빈이라는 이름을 알리기에 충분한 ‘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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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은 탁구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다섯 살부터 탁구를 시작했다. 아버지도 선수 출신이고, 언니도 탁구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대학생 선수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2019년 역대 최연소(만 14세11개월16일)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이번에 한국 탁구 최연소(만 17세)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대표 선발전에서 언니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했다.

탁구가 너무 좋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팀(대한항공)에 입단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자신이 탁구를 잘해야만 탁구 인기가 많아질 것 같아 성적에 더 욕심을 내기도 한다. “탁구가 할 때는 되게 재밌는데, 볼 때는 하는 것만큼은 재미가 없는 것 같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이 재미있는 운동(탁구)을 나만 하기 아쉽다”는 신유빈의 1차 목표는 어느 정도 이뤄진 듯하다. 신유빈 때문에 탁구의 매력이 다시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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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를 장식하려는 서채현

17일간의 열전인 도쿄올림픽 말미, 한국 선수단에 메달 소식을 알려줄 또 한 명의 10대가 있다. 이번 대회에서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포츠 클라이밍(암벽타기)의 서채현(18·신정고)이다. 서채현은 올림픽 개막 전에 AP통신이 동메달을 딸 것으로 예상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서채현은 여느 Z세대처럼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 왔다. 7세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암벽 등반을 시작한 뒤 한 번도 싫증을 내본 적이 없다. 야외든 실내든 암벽타기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 ‘스파이더걸’처럼 벽에 착 달라붙어 높게 높게 올라간다. 손가락 지문이 다 닳았는데도 멈춤 버튼은 없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국외 산을 타보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다. 그만큼 암벽타기를 좋아한다. 고3이라는 신분상 학교 공부도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적이 최상위권이다.

클라이밍 스포츠는 리드(높이), 볼더링(전략), 스피드(속도) 3종목을 합산해 순위를 매긴다. 각 종목 순위를 곱해 포인트가 낮은 선수가 우승한다. 예를 들어 리드 1위, 볼더링 3위, 스피드 4위를 할 경우 1x3x4를 한 12포인트가 선수의 점수가 된다. 서채현은 8월4일 예선, 8월6일 결선을 치른다. 메달을 바라지만 놓쳤다고 실망할 서채현도 아니다. 기회는 다시금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DNA, Z세대의 스포츠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스포츠는 세대교체를 경험하고 있다. 김연경(배구), 이대훈(태권도), 김지연(펜싱) 등이 이미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반면 김제덕, 황선우, 안산, 신유빈, 서채현 등 소위 Z세대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말 좋아하는 종목이 대중에게 조금 더 사랑받기를 원하고, 해당 종목에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인다. 국위 선양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당장의 성적에만 연연했던 예전 대표선수들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세대는 스포츠 자체를 즐기고 있다. 2020 도쿄올림픽이 던져준 또 다른 신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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