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이은 헌신에 과학을 더하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1.08.08 12:00
  • 호수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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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금메달 휩쓴 한국 양궁 대표팀의 저력에 주목
배경엔 ‘키다리 아저씨’ 자처한 정의선 리더십 있었다

대한민국 양궁 대표팀이 일을 냈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를 획득했다. 전 종목 석권은 놓쳤지만, 양궁에 걸린 5개의 금메달 중 4개를 한국이 쓸어담았다. 무한경쟁을 통한 실력 있는 선수 선발, 동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팀워크, 극한 상황까지 대비한 양궁협회나 코칭 스태프의 시스템적 지원 등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3관왕과 2관왕을 각각 차지한 안산, 김제덕 선수의 경우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과정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인사들이 있다. 대를 이어 한국 양궁 국가대표를 묵묵히 지원한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이다. 이들 부자는 양궁이 비인기 종목이던 1985년부터 37년간 체계적으로 양궁 인재 발굴과 첨단장비 개발, 양궁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그 결과 한국 양궁 대표팀은 다시 한번 세계 최강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연합뉴스

37년간 대를 이어 한국 양궁 체계적으로 지원

정몽구 명예회장이 처음 양궁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인 1984년이었다. 1984 LA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들의 금빛 드라마를 지켜본 뒤 양궁 육성을 결심했다. 이듬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한 정 명예회장은 현대정공에 여자 양궁단을, 현대제철에 남자 양궁단을 처음으로 창단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 명예회장은 심장박동수 측정기와 시력 테스트기를 양궁협회에 선물로 보냈다. 선수들의 기량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첨단 장비였다. 정 명예회장은 해외출장 틈틈이 시간을 내 장비를 장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정공에 지시해 레이저를 활용한 연습용 활을 제작하기도 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성능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산 활도 당시 정 명예회장 주도로 개발이 진행됐다.

1996년 애틀랜타 대회를 앞두고 세계양궁협회는 토너먼트 형태의 새로운 경기 방식을 도입했다. 한국 양궁이 대회를 독식하자 내놓은 고육지책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훈련 방법이 필요했다. 정 명예회장은 “시끄러운 곳을 찾아 훈련하는 게 어떻겠냐”고 협회에 제안했다. 이후 선수들은 꽹과리나 북 등 사물놀이를 하는 곳이나 초등학교 운동장 등을 찾아다니며 훈련을 했다. 그때 시작했던 훈련이 야구장 훈련으로 이어졌다. 한국 양궁 대표팀은 올림픽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관중이 꽉 들어차 있는 야구장을 찾는다. 야구 관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소음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다.

2016 리우올림픽 남자 양궁 결승전에서 만난 미국은 경기를 앞두고 항공모함에서 훈련을 했다. 강풍이 부는 항공모함 위에서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습하며 실전 경험을 키웠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은 미국을 세트 스코어 6대0으로 완파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리우에 이어 도쿄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딴 김우진 선수는 “야구장 훈련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고척 스카이돔에서 훈련했는데 관중이 많아 중압감이 매우 컸다. 경기 내내 야구장에서 화살을 쐈던 느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의 이 같은 DNA는 아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의선 회장은 국제경기가 있을 때마다 현지에서 직접 응원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쿄올림픽 때도 정 회장은 양궁협회장 자격으로 참석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 한 토막. 도쿄올림픽을 1년여 앞둔 지난 2019년, 정 회장은 양궁 경기가 열리는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을 찾았다. 한국에 돌아온 정 회장은 진천선수촌에 도쿄올림픽 양궁 경기장과 똑같은 시설을 건설하게 했다. 2020년 1월에는 올림픽이 열리는 도쿄의 7월말과 유사한 기후인 미얀마 양곤에서 기후 적응을 위한 전지훈련도 실시했다.

양궁협회 관계자는 “미세한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게 양궁”이라면서 “도쿄올림픽에서 예상되는 음향과 방송 환경, 기후 조건까지 염두에 두고 실전 같은 연습을 한 것이 좋은 성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평가했다. 안산 선수도 최근 MBC 라디오 《표창원의 뉴스 하이킥》에 출연해 “도쿄올림픽 시합장을 연습장에 똑같이 만들고 연습했는데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 양궁 경기장을 진천 선수촌에 그대로 재현

실제로 이번 도쿄올림픽에는 AI(인공지능)와 비전 인식, 3D프린팅 등 현대차그룹의 미래차 R&D(연구·개발) 기술이 대거 적용됐다. 고정밀 슈팅머신이 대표적이다. 이전까지 선수들은 자신에게 맞는 화살을 선별하기 위해 직접 활시위를 당겨야 했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허비됐다. 이를 자동화한 것이 현대차그룹과 양궁협회가 공동 개발한 슈팅머신이다. 70m 거리에서 과녁에 쏜 화살이 일정 범위 이내에 탄착군을 형성하면 1차 합격을 받는다. 이후 선수들이 직접 자신에게 맞는 화살을 테스트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위해 현대차그룹이 지원한 또 다른 기술이 점수 자동기록 장치다. 정밀 센서 기반의 전자 과녁은 점수를 자동으로 판독한다. 이후 무선통신을 통해 점수뿐 아니라 화살의 탄착 위치까지도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표시해 준다. 선수나 코칭 스태프가 직접 과녁에 가거나 망원경으로 보지 않아도 점수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전(Vision) 기반 심박수 측정 장비나 딥러닝 비전 인공지능 코치에도 현대차그룹의 혁신기술이 적용됐다. 비전 기반 심박수 측정 장비는 자체 개발한 안면 인식 알고리즘을 통해 선수의 심박수를 측정하고 경기력을 높이는 장비다. 딥러닝 비전 인공지능 코치는 현대차그룹 인공지능 전문조직 에어스(AIRS) 컴퍼니가 보유한 AI 딥러닝 비전 기술을 활용했다. CSV(Creating Shared Value) 활동을 통해 기업이 가진 자원과 전문성으로 스포츠 발전 등 사회적 공유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이런 선순환 구조가 다른 종목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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