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에 울고 웃는 대기업 회장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8.08 12:00
  • 호수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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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사라진 마케팅 특수…사비 지원 등 ‘개인기’로도 녹록지 않아

‘흥행 참패’ ‘최악의 경제 효과’ 등 각종 오명을 달고 다니는 2020 도쿄올림픽이다. 국내 재계에서도 마케팅 특수를 누리는 대기업은 거의 없다. 대신 개별 스포츠 종목에 대한 진심 어린 지원을 통해 무형의 성과를 노리는 분위기가 도드라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종목의 성적이 신통찮거나 단체장을 맡은 총수가 악재에 휩싸여 울상을 지은 기업이 많다. 

시사저널의 조사 결과 도쿄올림픽 종목 46개와 관련된 국내 단체는 총 33곳이었는데, 이 중 63%인 21곳의 수장(首長)이 기업인이었다. 특히 대한자전거연맹(구자열 LS그룹 회장), 대한양궁협회(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대한축구협회(정몽규 HDC 회장), 대한펜싱협회(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대한핸드볼협회(최태원 SK그룹 회장), 대한농구협회(권혁운 아이에스동서 회장) 등은 재벌 총수를 수장으로 맞아 올림픽 전부터 탄탄한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다. 

올림픽 개막 이후 정의선 양궁협회장을 제외하면 스포츠 종목 단체장으로서 활짝 웃은 총수는 없다. 한국 양궁은 금메달 5개 중 4개를 휩쓸었다. 2016 리우올림픽에 이어 두 대회 연속으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쓸어담으며 ‘세계 최강’의 지위를 재확인했다. 자연스레 양궁 우수 인재 발굴, 첨단장비 개발, 저변 확대 등에 이바지한 정 회장이 주목받았다. 아울러 정 회장은 올림픽 주요 경기를 관중석에서 직관하며 국내외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아이에스동서

올림픽 종목 협회장의 63%가 기업인 

최신원 펜싱협회장은 펜싱 대표팀의 선전에도 기쁨을 함께할 수 없었다. 200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지난 3월 구속기소돼 재판에 넘겨져서다. 그는 2018년 3월 펜싱협회장으로 취임한 뒤 2021년 1월 연임했다. 2019년 2월엔 아시아펜싱연맹 부회장에 당선됐다. 최 회장 체제에서 한국 펜싱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종합 우승, 2019년 세계선수권대회 종합 3위, 이번 도쿄올림픽 종합 3위를 기록했다. 

펜싱협회장사인 SK텔레콤의 아낌없는 지원에 최 회장의 남다른 펜싱 사랑이 더해져 이같이 눈부신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고 스포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앞서 최 회장의 제안으로 펜싱협회는 전문가 집단과 함께 펜싱 발전 중장기 전략을 수립했다. 2028 로스앤젤레스올림픽까지 대비한 국가대표팀의 단계별 경기력 강화 및 펜싱 저변 확대 전략도 마련했다. 

아울러 최 회장은 국내외 대회 현장을 직접 찾아 선수, 지원 스태프 등과 격의 없이 소통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외적으로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선수들의 대소사까지 직접 챙길 정도로 펜싱에 각별했던 최 회장이었다”며 “불미스러운 이슈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정의선 회장처럼 올림픽 현장에서 선수단을 응원하고 격려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양궁과 펜싱 종목에서 재벌 총수들이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데 대해 최동호 스포츠 평론가는 “재정상 문제, 내부 갈등 등으로 인해 갈수록 스포츠에서 손을 떼려 하는 기업 내지 총수들이 많아지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도 두 종목은 상당히 예외적인 모습을 나타내왔다”며 “가문의 전통과 총수 개인의 애착, 종목 단체인들의 지혜 등이 맞물려 나온 결과”라고 분석했다. 최 평론가는 이어 “재벌 총수 등 기업을 ‘물주’ 정도로 여기는 종목 단체인들, 반대로 ‘우리가 지원하니 단체를 좌지우지하겠다’는 기업도 없지 않다”며 “서로 예의를 갖지 않고, 진심을 다해 소통하지 않는 기업-종목 단체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새드 엔딩’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전폭적인 지원에도 신통찮은 성적에 울상 

성적이 저조해 총수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빛바랜 종목도 있다. 한국 남자 핸드볼 대표팀은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출전이 마지막이었다. 세계를 호령하던 여자 대표팀은 2010년대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위를 기록하고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사상 첫 조별리그 탈락이란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었다. 이번 대회에서 명예 회복을 노렸으나, 유럽 국가들의 벽에 막혀 8강으로 마무리했다. 

10년 넘게 핸드볼 발전을 위해 애썼던 최태원 핸드볼협회장 입장에선 핸드볼 대표팀의 결과가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최 회장은 2008년 12월 협회장에 올라 2013년 연임했다. 이후 2014년 초 물러났다가 2016년 핸드볼협회와 국민생활체육 전국핸드볼연합회의 통합 회장에 추대돼 다시 핸드볼과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SK핸드볼 경기장을 2011년 건립했고, 남자부 코로사와 여자부 용인시청이 해체되자 SK 호크스(남자)와 SK 슈가글라이더즈(여자)를 창단했다. 유소년 육성을 위한 핸드볼 발전재단 설립과 핸드볼 아카데미 운영, 국가대표팀 경쟁력 강화 지원 등 1000억원 이상의 투자를 단행해 왔다. 도쿄올림픽 여자 대표팀의 사기 진작을 위해 금메달 획득 시 선수 1인당 1억원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의 포상금도 내걸었다. 코치진을 포함하면 총 22억원 규모였다. 

농구는 올해 초 권혁운 아이에스동서 회장이 농구협회장으로 취임한 후 변곡점을 맞을 것으로 기대됐다. 권 회장은 농구협회장 선거 출마에 대해 “한국 농구가 과거보다 침체해 있고, 국민에게도 외면받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결심했다”면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한국 농구의 재건 및 명성 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구협회장을 기업인이 맡는 것은 2004년 3월까지 협회를 이끈 홍성범 전 세원텔레콤 회장 이후 약 17년 만이다. 권 회장은 7월엔 한국 농구 발전을 위해 10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농구 대표팀은 최종 예선에서 탈락하며 아쉬움을 자아냈다. 여자 대표팀은 본선 조별리그에서 떨어졌다.  

ⓒ연합뉴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왼쪽)이 2019년 7월1일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 준우승 기념 격려금 전달식에서 정정용 감독(오른쪽), 이강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축구는 자타 공인 최고 인기 스포츠다. 축구협회와 이를 이끄는 정몽규 회장에게 쏟아지는 부담은 다른 종목을 압도한다. 그러나 도쿄올림픽 결과가 좋지 않아 스포트라이트는 곧바로 질타로 바뀌었다. 여자 축구는 사상 첫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남자 축구는 세계 최초로 9회 연속 본선 진출을 달성했음에도 마지막 멕시코와의 8강전에서 대패하며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정 회장은 2013년 이후 3연임하고 있다. 

메달권에서 먼 사이클은 구자열 자전거연맹 회장의 관심과 지원을 듬뿍 받고 있다. 연맹은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에게 메달 획득 여부나 종류에 상관없이 최소 5000만원을 지급하고, 메달을 따면 이사회를 열어 추가 포상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구 회장은 연맹이 지급하는 금액과 동일한 액수의 포상금을 사비로 쾌척할 예정이다. 과거부터 자전거 사랑이 각별했던 구 회장은 2009년부터 13년째 연맹을 이끌면서 각종 대회 때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에게 격려금을 전달했다. 스스로도 산악자전거대회에 참가했을 만큼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기업 오너들, 올해 종목 단체장 선거 휩쓸어 

재정난·스폰서십 유치 등 난관 돌파할 적임자로 인정 

올해 스포츠 종목 단체장 선거에서 새로 수장을 맡은 인물 중에는 유독 기업 오너가 많다. 올해 1월 이중명 대한골프협회장(아난티 회장)을 비롯해 최윤 대한럭비협회장(OK금융그룹 회장), 조해상 대한레슬링협회장(해마로 대표), 이종훈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DYC 대표), 이상현 대한하키협회장(태인 대표) 등이 해당 종목의 마니아를 자처하며 협회장 선거에 도전해 당선됐다. 

이상현 태인 대표는 대한하키협회장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당선됐다. 태인은 LS산전과 함께 자동누전차단기와 배선용 차단기를, SK하이닉스반도체와 함께 메모리모듈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이 회장은 사상 최초로 3대를 이어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단체장을 맡았다. 외할아버지인 고(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이 대한역도연맹회장을 지냈고, 아버지인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회장 역시 대한산악연맹회장을 역임했다. 

최윤 OK금융그룹 회장은 대한럭비협회장 선거에서 유효 투표 수 104표 가운데 78표를 획득해 당선됐다. 그는 ‘뼛속까지 럭비인’을 자처하며 2015년 말부터 지난해까지 협회 부회장을 맡아 한국 럭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왔다. 

그는 회장 취임 후 도쿄올림픽을 맞아 럭비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면 1인당 최대 5000만원을, 메달을 따지 못해도 1승만 하면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 남자 럭비 7인제 대표팀은 역사적인 올림픽 첫 승을 거두진 못했지만, 국내 럭비 도입 약 100년 만에 처음 올림픽 본선에서 득점을 올리는 등 도쿄에서 새 역사를 썼다. 

자동차 부품 및 일반 산업용 부품 전문기업인 DYC의 이종훈 대표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선거에서 이순철 SBS 해설위원, 나진균 전 협회 사무국장을 따돌리고 회장으로 뽑혔다. 그는 협회의 재정적·행정적 안정을 우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중소기업 해마로의 조해상 대표는 지난 1월 열린 레슬링협회장 선거에서 143표 중 76표를 얻어 63표를 획득한 김재원(전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후보를 제치고 회장에 당선됐다. 당초 김 후보의 우세로 예상됐으나 ‘매년 협회에 5억원 후원금 지원’ 등 공약을 내세워 반전을 이뤄냈다. 이 밖에 신신제약 오너 2세 이병기 대표는 6월 대한철인3종협회장 선거에 단독 출마해 만장일치로 당선됐다. 

스포츠계에서 기업인 출신 단체장들이 각광받는 데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스포츠 종목 단체들의 열악한 재정 구조는 고질적인 문제다. 기업들의 지원이 필수적인데, 경영환경 변화와 스포츠 위상 축소로 점점 스폰서십을 따내기 어려워지고 있다”며 “현안에 대처하려면 기업 오너가 직접 회장으로 뛰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따라 선거에서 표가 몰리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기업인들이 국내보다는 해외에서의 이미지를 챙기기 위해 종목 단체장을 맡는 분위기도 있는 듯하다”며 “일부 종목의 경우 국내보다 해외에서 위상이 높고, 스포츠를 지원하는 기업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최동호 스포츠 평론가도 “그간 전문가, 즉 체육인이 해당 종목 단체장을 맡아 한계를 내비친 사례가 종종 있었다”며 “이에 가장 중요한 재정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기업인 회장에 대한 저항감이 많이 사라졌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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