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맡길 에이스 한 명이 없었다…예고됐던 한국 야구 위기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14 12:00
  • 호수 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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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한국 야구의 고유성도 사라져

“한국 야구는 위기다.”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현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 고문) 등 야구계 원로들은 몇 년 전부터 이런 말을 해왔다. 하지만 ‘위기’는 800만 관중 돌파와 2019 프리미어12 준우승 등으로 가려졌다. 이번 도쿄올림픽은 그 위기가 표면으로 드러난 대회였다. 한국 야구는 3승4패의 성적으로 4위를 기록했다.

6개국만 출전했다는 데 방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6개국은 나름 대륙별 예선 등을 거쳐 올라온, 그나마 야구 ‘좀’ 하는 나라들이었다. 문제는 3승4패의 성적이다. 한국은 이스라엘(2승)과 도미니카공화국(1승)을 상대로만 이겼다. 실질적 경쟁자인 일본(1패), 미국(2패)을 상대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위엄은 전혀 없었다.

ⓒ연합뉴스
8월5일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야구 패자 준결승 한국과 미국의 경기에서 2대7로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 대표팀 선수들이 아쉬워하고 있다.ⓒ연합뉴스

“한국 선수 스윙, 몸집 큰 미국·도미니카 선수보다 더 컸다”

도쿄올림픽으로만 한정하면 에이스 부재가 컸다. 한국 대표팀에는 단 한 경기라도 믿고 맡길 투수가 없었다.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한 좌완 트로이카(류현진·김광현·양현종)는 물론이고, 대표팀 1선발로 꼽혔던 박종훈(SSG)이 급작스럽게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라 명단에서 제외됐던 게 컸다. 작년에 언터처블 구위를 보여준 좌완 구창모(NC)의 회복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특A급 선발투수 부족으로 대표팀 구성에도 애를 먹었다. 김경문 대표팀 감독은 원태인(삼성), 고영표(KT), 최원준(두산), 김민우(한화), 박세웅(롯데), 이의리(KIA) 등 선발 자원을 많이 뽑았다. 3이닝 이상 투구가 가능한 투수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독이 된 선택이었다. 미국과의 패자 준결승전 때나 도미니카공화국과의 동메달 결정전 때 경기 후반 무너진 것이 그 증거다. 원정 술자리 파문으로 태극마크를 내려놓은 한현희(키움) 등과 같이 위기관리 능력이 있는 구원투수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생긴다. 좌완 트로이카 전성시대 이후 리그를 대표할 만한 투수는 왜 나오지 않은 것일까. 단순히 아마추어 선수들 기량 하락으로만 볼 수는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외국인 선발투수를 2명씩 기용하는 데 따른 영향이 없지는 않다.

KBO리그는 2003년부터 2013년까지 구단당 2명(NC는 한시적 3명)씩 외국인 선수를 보유했다. 대체로 타자 1명, 투수 1명을 보유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9구단 NC와 10구단 KT가 등장하면서 변화가 왔다. 구단 간 전력 차이를 단시간에 줄이려는 방법으로 외국인 선수 보유 수 확대를 택했다.

2014년부터 구단들은 3명의 외국인 선수 영입이 가능해졌다. 투수 2명, 타자 1명을 가장 많이 택했다. 이때부터 선발 5인 로테이션 중 1~2선발 두 자리를 외국인 투수가 맡게 됐고, 국내 선발투수들의 설 자리는 좁아졌다. 감독들은 공 빠른 신인 투수들에게는 중간계투를 맡겼다. 모든 팀이 ‘우승’만을 목표로 달리다 보니 눈앞의 성적에만 연연했고, 결국 더딘 세대교체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류현진·김광현·양현종 이후의 특A급 투수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단지 ‘반짝’ 빛났다가 사라지는 투수들만 존재할 뿐이다.

특A급 선발투수의 부재와 함께 한국 야구는 이번 올림픽에서 무색무취의 야구를 선보였다. 한국 야구의 고유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 대회랄까. 선수들이 스스로 경기를 풀어가는 BQ(야구 지능) 또한 떨어졌다. 사실 현재의 KBO리그는 과거와 매우 다르다. 몇 년째 이어진 타고투저의 결과로 타자들은 1번 타자든, 4번 타자든, 9번 타자든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방’을 노리는 타격을 한다. 좋은 타격 지표는 FA 잭팟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선수들은 수비보다는 공격에 더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1점을 내기 위해 한 베이스를 더 가는 야구는 구식이 되고 말았다. 희생번트 등도 마찬가지다. 수비 좋은 야수는 백업으로 밀렸고 공격력 좋은 야수로 그라운드는 채워졌다. 기본기는 실종되고, 프로답지 않은 실책은 연발된다. 지도자 탓을 하지만 요즘 선수들은 지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트랙맨 등 기계를 더 신뢰한다. 리그 사정이 이러한데 국제대회 성적이 좋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일 뿐이다.

한 전문가는 “한국 선수의 스윙이 몸집 큰 미국·도미니카공화국 선수보다 더 컸다”고 지적했다. 이번 대표팀에는 2008 베이징올림픽 때의 정근우(은퇴)나 이용규(키움)처럼 상대 투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괴롭힌 선수가 박해민(삼성) 정도뿐이었다. 국내와는 다른 스트라이크존만 원망하면서 힘없이 물러서는 타자들을 바라보며 일부 야구계 원로들이 쓴소리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탈, 그리고 또 일탈

한국 야구는 도쿄올림픽 시작 전부터 큰 위기에 부닥쳤다.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일부 구단 선수들이 원정 숙소에서 지인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을 마시기 위해 원정 숙소를 이탈한 선수들도 있었다. 이는 사상 초유의 리그 중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몇몇 선수의 안일한 행동으로 KBO리그는 쑥대밭이 됐다. 올림픽 금메달로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

선수들의 일탈 행동은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있었다. 송진우 전 한화 코치의 아들인 키움 히어로즈 외야수 송우현은 음주운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 KIA 타이거즈 외국인 투수 애런 브룩스는 대마초 성분이 들어간 전자담배를 해외에서 주문한 게 들통나 구단으로부터 퇴출당했다. 현재 수도권 모 선수는 금지약물 투약 혐의를 받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탈로 팬들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워졌다. 하지만 작금의 위기는 올해 시작된 게 아니다. 선수들의 일탈 행위 또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일탈에 “야구로 사죄하겠다”던 그들이다. 일탈 행위와 상관없이 그들의 연봉은 매년 올랐고, 그들 대신 채찍을 맞은 것은 구단과 프런트, 그리고 KBO 사무국이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실타래가 엉켰다면 얽힌 부분을 찾아내 다시 풀어야만 한다. 얽힌 상태에서 봉합하려고 하면 상황은 더 꼬일 수밖에 없다. 무턱대고 비난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리그 안팎의 현실을 직시하고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저 종이 한 장의 사과만으로는 안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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