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넘의 아들(Son)은 이제부터 ‘손(Son)’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22 18:25
  • 호수 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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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 개막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맨시티 상대 결승골…“No Harry, No Problem(케인이 없어도 문제 없어)”

2021~22 시즌 토트넘 홋스퍼의 빛나는 출발은 손흥민의 왼발로 완성됐다. 한국 시간으로 8월16일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이하 EPL) 개막전에서 손흥민은 ‘디펜딩 챔피언’ 맨체스터 시티(맨시티)를 상대로 후반 10분 선제골을 터트렸다. 팀의 역습 과정에서 동료 스티븐 베르바인의 패스를 받은 손흥민은 특유의 경쾌한 드리블과 페인팅 동작으로 자신을 마크하던 수비수 네이선 아케를 떨어트렸다. 슈팅 공간을 포착하자 손흥민의 왼발이 불을 뿜었고, 그대로 공은 맨시티의 골문 구석으로 날아가 꽂혔다. 그 경기의 유일한 골이었고 토트넘은 누누 에스피리투 산투 감독의 첫 공식전에서 승리를 챙겼다.

맨시티에 강한 손흥민의 자신감이 또 한번 발현된 경기였다. EPL 입성 후 손흥민은 세계 최고의 축구 지도자인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맨시티를 상대로 총 7골을 터트렸다. 9골을 넣은 제이미 바디(레스터시티) 다음으로 돋보이는 ‘맨시티 킬러’다. 하이라이트는 2018~19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 1, 2차전에서 도합 3골을 기록하며 맨시티를 무너트리고 4강에 오른 순간이었다. 당시 토트넘은 그 기세로 결승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손흥민은 리그 최강 팀의 골문을 자주 열어젖혔다. 천적에게 또 한번 당한 맨시티는 역대 세 번째로 EPL 개막전에서 패한 전년도 챔피언이 됐다.

토트넘의 손흥민이 8월16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1~22 시즌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1대0 승리를 이끈 후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노쇼’ 케인과 비교되는 손흥민의 충성심에 찬사 일색

환상적인 재계약 기념 선물이었다. 손흥민은 지난 7월23일 토트넘과 4년 재계약에 사인했다. 현 계약대로면 2025년까지 토트넘 소속으로 동행하는데, 2015년 레버쿠젠에서 이적한 뒤 10년을 채울 수 있다. 만 29세에 택한 장기 계약이기 때문에 사실상 토트넘에서 커리어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토트넘도 팀 내 최고 대우(연봉 약 160억원)로 보답했다.

새로 취임한 누누 감독도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취임 선물을 받았다. 토트넘은 새 시즌을 준비하며 새로운 사령탑을 선임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명 감독에게는 거절당하거나 계약 합의 직전 돌연 불가 통보를 하며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런 진통 끝에 영입한 누누 감독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지만, 개막전에서 대어를 잡으며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꿨다. 손흥민은 과거 조세 무리뉴 감독 시절에도 부임 후 첫 골을 넣은 바 있다.

손흥민의 골에 가장 환호하는 이는 토트넘 홈팬들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제약을 없애고 개막한 EPL은 백신 접종을 완료했거나, 음성 확인서를 제출한 팬을 입장시킨다. 자연스럽게 경기장 내에서 마스크 없이 육성 응원이 가능하다. 5만8000명이 넘는 토트넘 팬들은 손흥민의 결승골이 터지자 지난 1년 반 동안 참아왔던 환희를 쏟아냈다. 손흥민도 동료들과 축하를 나눈 뒤 지난 시즌부터 득점 후 시그니처 동작으로 자리 잡은 카메라 세리머니를 했다.

토트넘 소속으로 손흥민이 기록한 108번째 득점은 특히 토트넘 팬들에게 환영받았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팀의 간판 해리 케인의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완벽히 치유했기 때문이다. 토트넘 역대 최고 선수인 케인은 만 11세에 토트넘 유스팀에 입단해 프로까지 입성한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다. 팀에서는 부주장이지만,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어 토트넘의 자부심 그 자체로 통했다. 하지만 올여름 케인은 이적 의사를 강력하게 표출했고, 맨시티행을 강력히 원하는 모습이다. 토트넘이 이적을 수락하지 않자 휴가 후 예정된 팀 복귀 일자에도 훈련장에 등장하지 않는 ‘노쇼’ 행위로 불만을 나타냈다. 그동안 케인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온 토트넘 팬들과 구단의 레전드들은 케인의 프로답지 못한 태업 행위를 맹렬히 비판했다.

케인 입장에서도 이적을 원하는 확고한 입장과 근거가 있다. 토트넘에서만 221골을 기록한 그는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바이에른 뮌헨), 엘링 홀란드(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멜루 루카쿠(첼시)와 함께 현존 유럽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다. EPL 득점왕을 세 차례나 차지했고, 2018년에는 월드컵 득점왕에도 올랐다. 하지만 우승에 늘 한 걸음 부족했던 팀 전력 탓에 프로 12년 차에 이르는 지금까지 트로피를 단 하나도 들지 못했다. 지난 7월 끝난 유럽축구선수권(유로2020)에서도 4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에 패해 또 준우승에 그쳤다. 무관의 제왕으로 끝나고 싶지 않은 케인은 최근 5시즌 동안 리그 우승만 3차례 달성한 맨시티의 영입 제안에 끌렸다.

문제는 토트넘이 팀 내 최고의 스타를 호락호락 보내주지 않으려는 데 있다. 중동 오일머니로 무장한 맨시티는 이미 토트넘에 케인의 이적료로 EPL 최고 기록인 1억 파운드(약 1570억원)를 제시했다. 하지만 토트넘은 1억5000만 파운드(약 2060억원)가 아니면 협상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토트넘-케인-맨시티 3자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재계약을 택하고 팀에 남은 손흥민이 맨시티를 무너트리는 결승골을 터트렸으니 팬과 언론의 관심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손흥민에게 환호하는 사진과 함께 ‘No Harry, No Problem(케인이 없어도 문제 없어)’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경기 결과를 보도했다.

반대급부로 거대한 이적료와 연봉 등으로 구축한 막강한 스쿼드 등 자본주의 힘에 종속된 축구판에서 아직 로맨스와 충성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손흥민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다. 손흥민 역시 케인처럼 커리어에 비해 트로피 복이 없는 상태다. 1년 가까이 이어간 토트넘과의 재계약 협상 과정 내내 트로피를 들 수 있는 팀으로의 이적 가능성이 언급된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손흥민은 모든 루머를 뿌리치고 “다른 팀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겸손한 소감과 함께 4년 재계약에 사인했다. 맨시티전 결승골 후 언론들은 손흥민이 잉글랜드나 브라질 국적이었다면 이적료 2000억원은 넘었을 것이라며 가치를 재평가했다. 토트넘 팬들은 손흥민의 득점 후 “케인 보고 있나?”라는 조롱의 합창을 했다. 팬커뮤니티에서는 “걱정 마. 우리에겐 진짜 아들(Son)이 있으니까”라며 잔류한 손흥민에 대한 애정의 글이 쏟아졌다.

 

손흥민의 맨시티전 결승골 한 방이 수백억 가치 해내

토트넘은 케인이 없는 공격진의 중심 역할을 손흥민이 해낼 수 있다는 데 확신을 갖게 됐다. 실제로 손흥민은 케인이 장기 부상으로 결장한 2018~19 시즌에도 최전방 공격수로 뛰며 루카스 모우라, 델리 알리와 함께 토트넘을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이끈 바 있다. 반대로 뛰어난 스쿼드 구성에도 최전방 공격수의 부재를 재확인한 맨시티는 마음만 급해졌다. 설령 케인을 보내더라도 이적시장 마감까지 토트넘은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며 맨시티로부터 더 큰 베팅을 이끌어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맨시티는 토트넘전 패배 후 상향 조정한 이적료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맨시티전에서 손흥민이 터트린 결승골 한 방이 수백억원의 가치를 한 셈이다.

영국의 대표 일간지 가디언은 “손흥민은 뼛속까지 토트넘이 새겨진 선수다. 케인의 시대가 끝나도 현명한 투자를 통해 손흥민을 중심으로 팀을 꾸리면 더 큰 잠재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파비오 파라티치 토트넘 단장도 “올여름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손흥민과의 재계약이었다. 최우선적으로 집중했다”고 말했다. 손흥민을 잡으면 케인이 떠나는 상황까지 대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케인이 떠날 경우 그가 남긴 엄청난 이적료를 재투자해 공격부터 수비까지 전방위적인 선수 보강을 준비 중인 파라티치 단장은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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