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성악 교수 허영희씨의 두 번째 눈물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8.25 07:30
  • 호수 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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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면과 철조망 ⑩] 제자와 함께 南 정착…“주위 도움으로 우뚝 일어서”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해요.”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온 허영희씨(62)의 목소리는 밝고 생기 있었다. 북한 혜산예술대학 성악과 교수 출신인 허씨는 2014년 12월 월남해 줄곧 본업과 상관없는 일을 해왔다. 리조트에서 청소하며 돈을 벌다가 2018년 11월 시사저널 인터뷰에 응했다. 탈북한 뒤 남한 언론과 가진 첫 인터뷰였다. 

ⓒ유튜브 채널 ‘디비티비(DBTV)

북한 음식점 창업으로 ‘마지막 도전’ 

당시 허씨는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던 중이었다.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북한에 두고 온 남편과 아들 걱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실망감 등이 그를 짓눌렀다. 3년이 흐른 지금 허씨는 많이 편안해졌고 웃음과 희망도 되찾았다. 그의 ‘마지막 도전’은 북한 음식점 운영이다. 

3년 전 인터뷰 때는 제주도의 한 리조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올해 5월 제주에서 북한 음식 전문점을 열었다. 하나원을 퇴소한 2015년 5월부터 쭉 제주에서 살았다. 5년 정도 리조트 청소 일을 한 뒤 개업 전 1년여 동안은 치과병원에서 일했다. 거기서 청소, 식사 준비 등을 맡다가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코로나19로 많은 자영업자가 힘겨워하는 시기에 식당을 열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애초에 가진 돈이 넉넉지 않았고 식당 운영 경험은 전무했다. 개업을 응원하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누가 환갑 넘어서 창업한다고 하면 만류하는 게 보통이지 않나. 그런데 부딪쳐 보고 싶은 열망이 불쑥 생겼다.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식당을 해보니 힘은 들어도 내 손으로 뭔가 만들어낸다는 긍지가 샘솟았다.” 

처음 해보는 장사여서 더 만만찮았을 텐데. 

“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를 새롭게 체험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자본가가 되어 보니 웬만큼 잘하지 않고는 성공하기 힘들겠단 생각이 절절히 든다. 한편으로는 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었을까 싶어 저절로 존경스러워졌다. 북한에선 ‘장사꾼’ 하면 나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직원도 고용했나. 

“남한 출신 직원 두 명과 같이 일한다. 인건비, 임대료, 전기·수도세 등 고정비가 만만찮더라. 월급 타서 혼자 소소하게 살던 생활과 차원이 다르다. 손님이 뜸하면 어찌나 근심스러운지(웃음).” 

식당의 주력 메뉴인 냉면은 평양의 옥류관 맛을 떠올려 만들었다. 북한에 살 때 집에서도 한 번씩 옥류관식으로 평양냉면을 해 먹곤 했다고 허씨는 회상했다. 그는 매일 직접 뽑은 면 위에 소·닭·돼지고기, 삶은 달걀, 지단, 배, 오이 등 고명을 올리고 동치미 섞은 육수를 부어 손님상에 내놓는다. 느릅나무 뿌리의 껍질(유근피)을 이용해 자체 개발한 제면 기술은 특허까지 받았다. 덕분에 일반 평양냉면보다 좀 더 구수한 맛이 난다. 허씨는 “(개업 전) 식당들을 돌며 평양냉면을 먹어보면 북한 맛이 제대로 안 나 아쉬웠다”며 “냉면을 비롯한 여러 메뉴를 연구하고 수십 차례 시행착오도 겪은 끝에 가게를 열었다”고 전했다. 

개업한 지 어느덧 3개월. 식당 일은 제법 손에 익었고 단골 손님도 생겼다. 여느 냉면집 사장처럼 허씨도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봐야 맘이 놓인다. 

사실 평양냉면은 허씨에게 애증의 음식이다. 평양냉면으로 가장 유명한 옥류관은 북한 주민들이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맛집’이 아니다. 당국의 행사나 외국인 관광객 수요 등을 빼고 일반 주민들이 맛볼 수 있는 양은 제한적이다. 평양에 쉽게 접근하지도 못하는 지방 사람들은 살면서 옥류관 냉면 구경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허씨는 평양에 출장이나 공연을 갔다가 매매꾼에게서 표를 구매해 겨우 옥류관 냉면을 먹어봤다. 

이후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껴 남한에 넘어오니 옥류관 냉면이 그저 흥밋거리로 회자되고 있었다. 허씨는 특히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 인권 논의는 아예 없고 만찬장의 옥류관 냉면과 이를 소개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 등 연성 이미지만 부각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생사도 모르는 남편과 외아들 얼굴이 겹치며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랬던 허씨가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평양냉면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이는 허씨의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는 방증이다. 치료제는 허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지인들이었다. 

허영희씨가 자신의 음식점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허영희씨 제공

상처를 줬던 평양냉면을 사업 아이템으로 선정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리조트 동료들에게, 또 치과 간호사들에게 가끔 평양냉면 등 북한 음식을 만들어줬다. 다 맛있다고 칭찬해 주면서 식당을 열어보라고 권유했다. 가족과 같은 이들의 응원에 용기가 생기더라. 월급 받는 편안한 생활도 좋지만, 다시 한번 무거운 짐을 지고 내달려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평양냉면의 반전(反轉)이다. 

“그렇다. 반전을 만들어준 치과 ‘딸내미’(간호사)들과 리조트 친구들이 나한테는 진짜 소중하다.”  

리조트 청소 일을 하다 만난 동료 몇 명은 2016년 허씨에게 ‘남편과 아들을 남한에 데려오는 데 보태라’며 각각 1000만원 넘는 거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동안 모아둔 돈과 합쳐 탈북 브로커에게 전달한 허씨는 애타게 식구들을 기다렸다. 부자(父子)는 강을 넘었으나, 남한까지 오는 데 실패했다. 중국에서 한 차례 전화를 걸어온 남편은 “장백과 연길 사이 어느 지점쯤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전하곤 연락이 끊겼다. 중국 공안에 의해 강제 북송된 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과 아들의 북송 소식에 허씨는 혼절했다. 이윽고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게 됐다. 끝없는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 때 퍼뜩 생각난 게 동료들이다. ‘죽더라도 동료들에게 돈은 돌려주고 죽자’는 책임감이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돈을 갚으려 하자 동료들은 “사람을 잃었는데 돈이 문제냐”고 손사래 치며 허씨와 같이 아파했다.

그렇게 허씨는 최악의 시기를 지나면서 인생의 동반자들을 얻었다. 다 없어져버린 줄 알았던 삶의 이유가 조금씩 다시 생겨났다. 2년여 만에 돈을 다 갚던 날 허씨는 동료들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그는 “힘들게 이제껏 지내오는 동안 많은 사람이 손을 잡아주고 세워줬다. 정말 잘 살아야겠다고 매일 다짐한다”면서 “한국에 와서 만난 이들과 내 인생이 같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식당 앞에서 사진 포즈를 취한 허영희씨ⓒ허영희씨 제공

“상처 딛고 통일 기다릴 것” 

허씨의 지인들은 지난 5월20일 식당 개업식 날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 중엔 허씨와 함께 탈북한 제자 현향씨(37)도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식당 일을 돕던 현씨는 주위의 요청을 듣고 스승의 손을 잡아끌었다. 향한 곳은 피아노 앞이었다. 이 식당엔 하얀 그랜드피아노가 한 대 있다. 손님이 없을 때 노래를 부르기 위해 허씨가 들여놓았다. 앞서 함께 무대에 몇 번 오른 두 사람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크게 감격한 모습이었다. 현씨의 피아노 연주에 허씨가 녹슬지 않은 청아한 목소리를 실었다. 지난 세월이 선율 속에 녹아들었다. 

2012년의 어느 날 허씨는 북한 당국의 호출을 받았다. 자신에게 성악을 배우는 제자 현씨를 감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현씨는 당국으로부터 남한 물건을 밀수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허씨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대신 현씨에게 “체포당하기 전에 북한을 떠나는 게 좋겠다”고 몰래 제안했다. 이런 정황이 발각돼 두 사람 모두 2013년 1월 구금 시설에 잡혀갔다. 

76일의 구금 기간 동안 허씨는 북한 체제의 실상을 체감했다. 결국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씨와 강을 넘기에 이르렀다. 현씨는 남한 정착 후 대학 뮤지컬학과를 졸업하고 법무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 허씨는 탈북 과정 등 과거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앞을 보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힘내서 살고 싶다”고 강조했다. 여전히 눈물이 많은 허씨다. 하지만 더 이상 슬퍼서 울진 않는다. 

앞으로의 계획은. 

“직원들과 똘똘 뭉쳐서 어려운 시국을 잘 이겨내고 싶다. 함께 신메뉴를 개발하고 영업 끝나면 맥주도 한 잔씩 하는 등 쏠쏠한 재미가 있다. 장사에서도 역시 함께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더라. 여력이 되면 고용을 더 하고 싶다.” 

꿈이 있다면. 

“그저 통일이 될 거라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현재 정세만 보면 통일이 정말 힘들겠구나 싶다. 그래도 꿈이라도 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 하겠다. 상처는 가슴속에 깊이 묻은 채 열심히 살며 그날을 준비하려고 한다. 언제 오더라도 떳떳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냥 돈을 많이 벌려고 식당을 연 게 아니다. 통일의 날까지 내가 북한에서 느꼈던 맛과 이 땅에서 받은 감동을 더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대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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