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코뿔소 무시했다가 큰코 다친다
  • 이광수 미래에셋증권 수석연구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9.02 11:00
  • 호수 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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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_부동산] 한국 가계부채 증가율 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경제 증가율보다 빠른 대출 속도에 우려

숫자에는 감정이 없다. 냉담하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숫자를 맹신하는 이유다. 숫자를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에 있지 않다. 변화를 읽기 위해서는 숫자를 만든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읽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야만 숫자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속도에 주목하는 이유다.

속도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이야기해 준다. 사람들이 불안하다고 생각하면 더 빨리 달리게 되고, 여유가 있다면 천천히 걸어가게 된다. 출근길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부동산 시장을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숫자를 통한 분석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숫자의 속도와 변화의 방향성을 이야기하고 내재돼 있는 심리를 읽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점진적인(점진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변화다. 아쉽게도 항상 현실과 이상은 매우 다르다. 부동산 시장도 경제성장을 그대로 반영해 점진적으로 변화한다면 가장 이상적일 수 있다. 가계소득이 증가할 만큼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 부동산은 다르게 움직인다.

선형으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감정과 심리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 격언 중에서 ‘시장은 탐욕과 공포 사이에서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탐욕과 공포 사이에서 흔들린다. 긍정적인 뉴스들이 시작되고 전망이 밝아지면 사람들은 탐욕스럽게 변한다. 돈 버는 일에 집중하고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다. 탐욕은 투자 경쟁을 일으키고 급격한 가격 상승을 일으킨다.

ⓒ연합뉴스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율이 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 를 차지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강남의 한 시중은행 앞에 붙은 대출광고 모습ⓒ시사저널 최준필

숫자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속도’

반대로 공포도 찾아온다. 부정적인 전망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다. 불확실성이 커지고 사람들의 공포심은 가격 하락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심리적 변동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부채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가계신용(잠정) 자료에 따르면 2021년 2분기 가계부채 잔액은 1806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저금리 구조에서 대출 증가는 불가피할 수 있다. 문제는 속도다. 가계부채 증가율을 살펴보면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은 9.4% 증가해 주요국 가운데 압도적인 1위(미국 3.4%, 일본 3.9%, 호주 2% 등)를 기록했다. 가계부채 현황보고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부채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내총생산의 세 배, 민간소비의 다섯 배에 가까운 속도로 증가했다. 속도뿐만 아니라 가계소득으로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인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도 170%를 초과해 OECD 국가들과 비교하면 크게 악화돼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서 가계부채가 급증한 가장 큰 요인은 부동산 대출 증가다. 부동산 빚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는 부동산 투자에 대한 사람들의 확신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도한 빚으로 집을 산다는 건 집값이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행위다. 빚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확신도 커진다는 말이다.

과거 많은 국가가 금융위기를 경험했다. 위기가 터질 때마다 정부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가 위기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많은 원인과 새로운 이론들이 제시됐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건 위기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BIS와 IMF 등 국제기관들이 찾은 위기 전조는 ‘경제성장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한 국내 민간 대출’이었다. 단순 부채 총량보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도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0% 미만이었음에도 연간 10%가 넘는 증가 속도가 문제가 됐다.

부동산을 이야기할 때 한국 가계부채 리스크는 항상 거론돼 왔던 문제다. 그럼에도 가계부채는 한 번도 부동산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적은 없다. 현재도 가계부채는 다른 어떤 부채보다 연체율이 낮은 상황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미셸 부커는 회색 코뿔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회색 코뿔소가 위험한 동물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다가갔다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알고 있음에도 중요하지 않고 위험하다는 사실은 언제나 중요하다.

최근 시중은행들이 가계대출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과도한 부채 증가 속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대출 감소와 더불어 금리 인상도 현실화됐다. 한국은행은 금융 안정을 위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부채 절대 규모가 크고 속도가 빨랐던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브레이크는 모든 탑승자들의 몸을 심하게 흔들 수 있다. 다수가 금리 인상이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변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지은씨는 “행복이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포기하고 행운에 매달린다”고 말했다. 행복과 행운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를 보면 행복은 ‘몸과 마음에서 느끼는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말한다. 반면 행운은 ‘좋은 운수’라고 돼 있다. 운수는 ‘이미 정해져 있어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말한다. 몸과 마음의 상태는 나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지만 운수는 그렇지 않다.

 

시중은행도 과도한 부채 증가에 부담

투자에서 ‘행복할 것인가’와 ‘행운을 믿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투자에서 행복보다 행운을 원한다. 그래서 항상 ‘이번엔 다르다’고 생각하고 무리하게 빚을 일으켜 투자한다. 문제는 운수는 급작스럽게, 아니 빠르게 변한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 집값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보다 행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로또 아파트 경쟁률은 3만 대 1을 넘겼다. 운을 기대하면서 여기저기 땅을 사고 거주하지도 않을 집을 사고 있다. 운을 기대할 때는 모든 것을 걸면 안 된다. 복권을 살 때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 운을 기대하면서 무리하게 대출을 일으키고 있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세상사 영원한 것이 없는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은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최근 빠르게 증가하는 부동산 대출을 보면서 ‘저 멀리 보이는 먼지가 혹시 회색 코뿔소 떼가 일으키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더 가까워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까? 최근 보여지고 있는 숫자가 불편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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