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영구결번’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0.09 11:00
  • 호수 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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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노 타임 투 다이》, ‘007 역사상 최고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영화

“나에겐 정말 기나긴 대장정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머리 위로 15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히트상품 제임스 본드로 15년을 보내는 동안 다니엘 크레이그는 본드 못지않은 유명인으로 사랑받았다. 최장수 007 요원이 됐고, 금발은 회색빛으로 바랬으며, 몸 여기저기엔 부상의 흔적이 새겨졌다.

그는 사실 2015년 개봉한 《007 스펙터》를 끝으로 007을 은퇴하려 했다. “제임스 본드를 또 연기하느니 차라리 손목을 긋겠다!” 그러나 팬들은 그와의 이별을 원하지 않았다. 제작진 역시 크레이그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고 굳게 믿었다. 구애와 설득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 번 더 연장된 임무 수행을 위해 다니엘 크레이그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더 절박하게 뛰었다. 전과 달리 본드의 행보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진짜 마지막이란 걸 알기에.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새롭게 거듭난 007

다니엘 크레이그가 더블오(OO) 살인 면허를 처음 부여받은 건 2006년. 그의 나이 서른여덟 때다. 출발은 여러모로 시끌벅적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를 눈여겨본 건, 제작자 바바라 브로콜리였다. 브로콜리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의 명성을 되살려줄 적임자라 여겼다. 당시 대중은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라는 NEW 타입 첩보요원에 매료된 상태였다. 마침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의 마지막 007 영화 《007 어나더데이》(2002)가 혹평을 받으며 자존심을 구겼다. 떠오르는 신성 제이슨 본에 밀려 본드는 조롱과 패러디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분위기였다. 영국에서 이 일은 단순히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영제국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크레이그는 자신이 제임스 본드의 적임자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결정 앞에서 서성였다. 고민 끝에 그가 브로콜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이번엔 팬들이 들고일어섰다. 크레이그가 6대 제임스 본드로 낙점됐다는 소식이 타전됐을 때 여론은 그야말로 싸늘했다. ‘금발 007이 말이 되냐(역대 본드는 모두 갈색 머리다).’ ‘키는 왜 이리 작냐.’ ‘우리의 007은 이렇지 않아!’ 팬들은 ‘blondnotbond.com’과 ‘danielcraigisnotbond.com’ 웹사이트까지 만들어 분노를 표출했다. 영국 언론도 동참했다. 일간지 데일리미러는 ‘내 이름은 블랜드(Blandㆍ매력 없는), 제임스 블랜드(James Bland)’라는 헤드라인을 뉴스에 달며 다니엘 크레이그를 때렸다.

2006년 11월 런던의 오레온 레스터 스퀘어에서 《007 카지노 로얄》이 공개되자 판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1953년 출간된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원작 소설로 만들어진 《카지노 로얄》은 007 시리즈의 기원으로 돌아가 근사하게 재부팅됐다. 영화는 박스오피스 정상에 깃발을 꽂았고, 팬들은 항의를 거두고 환호를 내질렀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만들어놓은 슈퍼 히어로적 007 이미지를 지우고 본드 캐릭터에 현실감을 입혔다. 보드카 마티니만 “젓지 않고 흔들어서” 먹던 습성도, 관능적인 미녀들과 호텔을 들락거리는 플레이보이 기질도, 유유자적하던 모습도 버리고 인간적 고뇌를 지닌 순정 마초로 거듭났다. 이를 통해 크레이그는 본드 시리즈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역대 007 시리즈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역대 007 시리즈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007 존재 이유를 증명한 《007 스카이폴》

《007 퀸텀 오브 솔러스》(2008)를 지나 나온 007 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이자 23번째 작품인 《007 스카이폴》(2012)은 반세기 007 역사에 걸맞은, 심지어 재미와 품격, 깊이까지 갖춘 엄청난 영화였다. 무엇보다 냉전 이후, 싸워야 할 명분에 구멍이 뚫린 첩보영화들 사이에서 《스카이폴》은 그들이 왜 필요한가를 멋들어지게 증명해 보였다.

《스카이폴》로 007 세계에 입문한 샘 멘데스 감독은 청문회에 불려간 정보부 국장 M(주디 덴치)을 통해 앨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를 소환한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한 많은 것이 남아있으니, 예전처럼 천지를 뒤흔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모습과 교차 편집되는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007 시리즈의 내일을 기대하게 했다. 덩달아 치솟은 영국인들의 자부심.

제임스 본드를 향한 영국의 애정 크기는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증명됐다. ‘여왕 수행 미션’을 하달받은 다니엘 크레이그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버킹엄 궁전을 활보한 후, 올림픽 경기장에 나타나 여왕과 함께 ‘하늘에서 낙하’(skyfall)하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이 순간, 그에게 많은 말은 필요 없어 보였다. 단 한마디면 족해 보였다. “My name is Bond, James Bond.”

《스카이폴》의 진한 여운을 안고 샘 멘데스가 다시 메가폰을 잡은 《007 스펙터》는 아쉽게도 전편만큼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만듦새는 다소 들쑥날쑥했고, 좋은 장면만큼이나 나쁜 장면도 두드러졌다. 마침 다니엘 크레이그가 시리즈 하차 의사를 밝히던 때이기도 한데, 영화의 아쉬움에 나는 당시 다음과 같은 주지의 글을 쓴 바 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대로 007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명예 회복을 하고 떠났으면 좋겠다”고.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은 넘쳤다. 앞서 언급했듯, 크레이그는 많은 사람의 만류로 은퇴를 연기했다.

 

아듀!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

크레이그의 첫 미션이 그랬듯, 마지막 임무로 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다. 다니엘 크레이그와 올림픽 개막식 영상을 만든 대니 보일이 제작자와의 의견 차이로 감독직에서 도중 하차했다. HBO 드라마 《트루 디텍티브》로 이름을 알린 캐리 후쿠나가가 감독으로 새로 내정된 건 영화가 제작에 들어가기 3개월 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니엘 크레이그의 발목 부상으로 촬영이 밀렸고, 영화가 완성됐을 땐 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이 기약 없이 밀렸다.

그렇게 어렵게 당도한 《노 타임 투 다이》는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아쉽다. 6년 전 필요했던 건, 어쩌면 아름답게 이별하는 결단이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여정으로서도 아쉽고, 완성도 면에서는 더 아쉽고, 007 시리즈 역사로 봐도 뼈아픈 실책으로 남을 법하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야말로 끝내준다. 그러나 캐리 후쿠나가는 팽팽한 스릴과 재미를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끌어가지 못한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구멍 뚫린 서사와 허술한 악당, 지나치게 감성적인 구간의 나열을 보여주며 하락한다. 이런 이별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역시나 이 영화를 봐야 한다면,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일 것이다.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 역사 최고의 제임스 본드 중 한 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단순히 추억 때문이 아니다. 가장 오랜 시간 살인 면허를 소지해서도 아니다. 그가 제임스 본드의 뿌리를 다시 찾고, 정체성 확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캐릭터의 진화도 이뤄냈기 때문이다. 인간적이었고, 고독했으며, 사랑을 알았던 남자.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자주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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