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서울시 ‘엇박자’에 헛도는 주택 공급
  • 길해성 시사저널e. 기자 (gil@sisajournal-e.com)
  • 승인 2021.12.01 10:00
  • 호수 1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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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빗장 푸는데, 정부는 틀어막아 시장 혼선
재건축 단지들 희비도 크게 엇갈려

최근 심의·인허가 단계에 오른 서울 재건축 단지들이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 대치우성1차, 잠실 미성크로바, 방배 신동아, 용산 산호 등 재건축 단지들이 잇따라 건축심의를 통과했다. 대부분 정부와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규제 기조 아래 사업 진척이 더뎠던 곳들이다. 업계에선 강남 등 주요 지역 재건축에 반대하고 있는 정부의 기조를 서울시가 나서 깨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보고 있다.

김성보 서울시 주택정책실장이 11월4일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주택 공급 관련 기 자설명회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오세훈표’ 재건축, 강남·여의도 단지들 ‘수혜’

신속통합기획도 사업이 지지부진했던 주요 재건축 단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신속통합기획은 민간 주도 개발에 공공이 정비계획 수립 초기 단계부터 각종 계획과 절차를 지원하는 제도다. 오 시장이 취임한 후 주택 공급에 속도를 내기 위해 고안했다. 인허가 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게 최대 강점이다. 신속통합기획 적용 시 정비구역 지정 절차는 5년에서 2년으로 줄어든다. 사업시행인가 단계에선 통합심의를 통해 소요 기간이 1년6개월에서 9개월까지 단축된다. 공공이 직접 시행까지 하는 정부 방식과 달리 민간 주도 개발을 서울시가 지원하는 방식이라는 점도 인기를 끄는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신속통합기획은 강남에서 호평을 받는 분위기다. 대치 미도, 송파 장미, 여의도 시범 등에 이어 강남 재건축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대치 은마아파트까지 참여 의사를 내비쳤다. 은마아파트는 신속통합기획 동의서를 받기 시작한 지 3일 만에 동의율이 10%(500여 명)를 넘는 등 주민들의 관심이 높다. 이곳은 2003년 말 조합 설립 추진위원회가 설립된 이후 18년째 답보 상태다. 2010년 3월 안전진단을 통과하고 2017년부터 ‘정비구역 지정 및 정비계획안 지정 신청서’를 서울시에 네 번이나 제출했지만 모두 반려됐다. 신속통합기획으로 정비구역 지정·조합 설립 이후 심의 기간이 크게 단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밖에 잠원 신반포2차, 여의도 한양·삼부 등도 주민동의서 징구에 나섰다.

국내 최고 부촌으로 꼽히는 압구정동도 ‘오세훈표’ 재건축에 합류했다. 압구정3구역은 신속통합기획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에 신속통합기획 설명회 개최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각 지역 간판급 단지들이 합류하면서 오 시장의 주택 공급도 더욱 힘을 받을 전망이다. 오 시장은 신속통합기획으로 사업 속도를 높이고, 주요 재건축 단지 사업 재개 등을 통해 2025년까지 매년 6만4000~9만5000가구를 공급할 계획이다. 여기에 민간 재개발 신속통합기획 공모까지 더하면 2030년까지 서울 내 80만 가구를 공급한다는 목표다.

반면 재건축 초기 단계 단지들은 초상집 분위기다. 재건축 첫 관문인 안전진단을 통과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 됐기 때문이다. 안전진단은 재건축 가능 여부를 살펴보는 단계다. 통상 ‘예비안전진단(현지조사)→1차 안전진단(정밀안전진단)→2차 안전진단(공공기관 적정성 검토)’ 3단계로 이뤄진다. 안전진단을 모두 통과하면 재건축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안전진단 문턱이 높아진 건 2018년 3월 평가 기준이 강화되면서다. 당시 재건축 시장을 중심으로 집값 불안이 거세지자 시장을 잡겠다는 게 정부의 취지였다. 이 때문에 다수의 노후 단지가 안전진단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는 상황이다. 올해 들어서만 강동구 명일동 고덕주공9단지, 노원구 공릉동 태릉우성, 양천구 목동 목동11단지 등이 최종 단계에서 탈락했다. 특히 준공 37년 차로 노원구에서 가장 낡은 아파트로 꼽히는 태릉우성이 떨어진 것은 충격이 컸다. 안전진단 기준이 강화된 이후 2차 안전진단까지 통과한 단지는 5곳에 불과하다. 변경 전 3년 동안 서울에서 56개 단지가 안전진단을 통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안전진단의 최종 결정권이 사실상 국토교통부에 있다는 점도 통과가 어려운 요인으로 꼽힌다. 1차 안전진단은 서울시장이 업체를 선정할 수 있어 속도를 낼 수 있다. 하지만 2차 안전진단은 국토부 산하 공공기관(한국건설기술연구원·국토안전관리원)이 맡는다.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자체들이 항의에 나섰지만 정부는 기존 정책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 10월 김수영 양천구청장, 오승록 노원구청장, 박성수 송파구청장은 노형욱 국토부 장관을 만나 재건축 안전진단과 관련한 주민들의 의견을 전달하며 합리적인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꾸준히 안전진단 기준 완화를 요청했지만, 노 장관은 여전히 집값 안정화를 위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단지들은 새로운 정부에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강동구 명일동 한양아파트는 안전진단 신청을 내년 대선 이후로 연기했다. 바로 옆 우성아파트 역시 지난 6월 1차 안전진단을 통과했지만 2차 안전진단 신청은 잠정 보류한 상태다. 이 밖에도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 3·6단지, 송파구 풍납동 풍납미성 등 재건축 초기 단계 단지들이 안전진단 추진을 줄줄이 미루는 추세다.

김영한 국토교통부 주택정책관이 9월15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제19차 위클리 주택 공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노원·강동·목동 등 안전진단 단계에서 좌절

안전진단에서 한 번 떨어질 경우 추가 투입되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다는 점도 주저하는 이유로 꼽힌다. 강동구 명일동 재건축 추진위원회 한 관계자는 “2차 안전진단에서 떨어지면 예비안전진단부터 다시 받아야 하는 등 사실상 재건축사업에 재동이 걸리게 된다”며 “수억원에 달하는 안전진단 용역 비용을 또다시 모금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고 말했다. 이어 “불확실성이 큰 만큼 차라리 내년에 정부가 바뀐 이후 안전진단을 추진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재건축이 늦어질수록 오히려 시장을 자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주택 공급을 활성화하겠다고 하면서 재건축을 과도하게 규제하는 것은 정책의 엇박자다”며 “안전진단을 내년 대선까지 미루면 그만큼 지연된다는 의미인데, 시장에 공급 부족 시그널로 비춰질 수 있다”고 우려감을 나타냈다. 이어 “서울 주요 주택 공급 통로인 재건축 절차 지연을 없애야 장기적으로 집값 안정화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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