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뱃사공》은 우리 콘텐츠” 의령군이 불붙인 국민 애창곡의 진실
  • 이상욱 영남본부 기자 (sisa524@sisajournal.com)
  • 승인 2021.11.3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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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주인공에…의령군 “의령 사람” 함안군 “이필남씨 주인공 아니다”

경남 함안군과 의령군이 국민 애창곡인 《처녀 뱃사공》이 서로 자신들의 콘텐츠라고 주장했다. 김봉남 의령군의회 의원은 《처녀 뱃사공》의 실제 주인공이 의령 사람이며, 함안지역에 세워진 《처녀 뱃사공》 노래비 내용이 사실과 달라 바로잡아야 한다고 공세를 펼쳤다. 그러자 함안군은 김 의원에게 “사실관계에 오인 있다”고 역공했다. 

경남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산 99번지에 건립된 《처녀 뱃사공》노래비 ©함안군
경남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산 99번지에 건립된 《처녀 뱃사공》노래비 ©함안군

김 의원은 지난 25일 의령군의회 본회의에서 5분 발언을 통해 “《처녀 뱃사공》의 주인공 이필남 여사(84)는 1953년 윤부길(《처녀 뱃사공》의 작사자)을 만났을 당시 만 16세였다.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정곡면 적곡리 42-2번지 북실나루터에서 생활하면서 1951년부터 1955년까지 북실나루터에서 대산면 서촌리 산 125번지 다리미산 기슭으로 왕래하는 나룻배 사공을 했다. 이어 결혼 후 북실나루터에서 약 1㎞ 남짓 떨어진 함안군 법수면 윤외리에 살다가 현재는 가야읍에 살고 있다”며 “이 여사와 윤부길의 첫 만남은 1953년 9월 다리미산 선착장에서 의령 북실나루터로 일행을 건너 주며 이뤄졌다”고 했다. 처녀 뱃사공 실제 주인공 이씨는 의령 사람이며, 배를 젓던 나루터는 함안군 대산면 악양나루터가 아니라 의령군 정곡면 적곡리 남강 나루터라는 것이다. 

이어 김 의원은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산 99번지에 건립된 《처녀 뱃사공》노래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함안군 대산면 악양나루터가 있었던 곳은 낙동강이 아닌 함안천이며, 이곳의 배는 노가 없는 줄배였음으로 당연히 노 젓는 뱃사공이 없었다”면서 “비문에 적힌 군 복무 중 행불자로 등재된 박기준씨는 6.25 전쟁 몇 년 전에 이미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 군 복무 중 행불이라는 내용은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했다. 

김 의원은 그러면서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비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의령군이 나서서 공식적으로 《처녀 뱃사공》의 진위를 밝히고 함안군에 그에 맞는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처녀 뱃사공이 활동했던 의령군 정곡면 적곡리 북실나루터 복원과 함께 의령 명품 100리길 조성사업과 연계해 관광지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자 함안군은 “이필남씨가 윤부길 악단을 만난 뱃사공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함안군은 본지에 “이필남씨는 1953년 부친이 사망한 후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다음 해인 1954 겨울 남지장에서 의령장으로 가는 일행을 서너 번 배를 태워준 적이 있고, 그 일행의 20대 청년 두 명을 포함해 모두 네 명이다. 세 명만 올 때도 있었다”며 2008년 함안군이 이씨와 나눈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또 “그들은 앵금(해금)으로 추정되는 악기를 소장하고 있었다”면서 “코미디언 배상룡 선생이 남긴 기록 등에 따르면 윤부길 선생의 악극단 규모는 20여 명 정도였고, 가족도 이동해 인원이 많았다. 당시 그들은 악양나루의 방 3개에 나눠 숙박했고. 윤부길 악단에는 앵금(해금)이라는 악기가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했다. 함안군은 이씨 증언과 여러 증언·정황상 이씨가 뱃사공을 했지만, 윤부길 악단을 만난 뱃사공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함안군은 “악양나루터에 노 젓는 뱃사공이 없었다”는 의령군 주장에 대해 오히려 “1950년대 악양나루터는 남강댐 건립 전이라 홍수조절이 되지 않던 시기다. 갈수기에는 줄배를 이용했으나, 그 외의 경우는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고 한다”며 “1950년대 악양루 부근에서 노가 달린 배를 찍은 사진도 있고, 노 젓는 배가 있었다고 인근 주민들이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함안군은 악양루에서 바라보이는 함안천과 남강을 낙동강이라고 한 이유를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고 밝혔다. 함안군 관계자는 “윤부길 선생이 피난 생활을 주로 했던 곳이 부산이고, 지명도가 있는 강이 낙동강이라 노랫말에 평소 익숙한 낙동강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고 했다. 

뱃사공 오빠의 사망 시점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함안군은 “사실관계가 맞지 않다”고 했다. 이처럼 지난 2008년부터 이어져 온 처녀 뱃사공 진실 공방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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