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게 공포였다”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26 11:00
  • 호수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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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시어로 시대와 싸운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최승자 지음│난다 펴냄│192쪽│1만3000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최승자 지음│난다 펴냄│192쪽│1만3000원

당대 시를 사랑했던 이들은 상당수가 최승자 시인에게 빚을 졌다. 광주의 상흔과 전두환 정권의 탄생으로 먹먹한 이들에게 시인은 1981년 9월 내놓은 문지시선 《이 시대의 사랑》을 시작으로 그 고통을 고스란히 토해냈다. ‘일찍이 나는’이나 ‘개 같은 가을이’ 등 수많은 시편은 목울대를 숨기고 흐느끼던 이들에게 통쾌한 내장 파열 같은 느낌을 줬다. 4~5년 간격으로 찾아온 최 시인은 시대의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성복, 황동규, 마종기 같은 중견과 황지우, 박노해, 기형도 등 젊은 시인 사이에서 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를 넘겼고, 1990년대를 맞게 하는 기적도 만들었다. 하지만 시인의 독한 시어는 무협지에서 말하는 주화입마(走火入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집의 간격도 멀어졌고, 시어의 명징성도 약해졌다. 그리고 간간이 병마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1980년대를 건너온 이들에게 최 시인은 시인이자, 인문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나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 같은 책도 내놓았기 때문이다. 최 시인이 아니면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역서였다. 그를 통해 실비아 플라스 등 여성 문인들이 한국의 페미니즘 세계에 수혈됐다. 이번에 선보인 두 권의 산문집은 작가가 느끼던 고통을 산문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어떤 나무들은》은 기존 아이오와 문인 연수 과정을 개정판으로 내놓았고,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기존 산문에 나중에 쓴 산문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더 신선한 책이기도 하다.

작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정상적인 활동이 쉽지 않았다. 2010년에 쓴 ‘최근의 한 10여년’은 “내 병의 정식 이름은 정신분열증이다. 거진 다 나았어도 아직은 약을 먹어야 한다”로 시작한다. 적지 않은 시인이 그러듯이 산문집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는데, 시인도 마찬가지다. 이번 책도 출판사와의 부채감 때문에 32년 전에 펴낸 책에 이후 산문 몇 편을 추가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미에는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이라고 마무리 짓는다.

최승자의 새 책을 집어든 이들에겐 과거 같은 그의 시어를 기대하는 마음은 없을 것이다. 또 밑줄 칠 문장을 기대한 이도 없을 것이다. 그냥 최승자라는 이름만으로, 그 시인이 좀 더 편안하기를 바라는 바람으로 책을 든다. 하지만 독자들은 결국 짧은 산문집을 통해 또 다른 최승자를 만날 수 있다. 책을 통해 죽음이나 군대, 페미니즘에 대한 그의 다양한 생각뿐만 아니라 작가의 뇌리에 깊게 투영된 어린 시절, 대학 시절도 만날 수 있다. 그런 작가를 흔드는 죽음과 공포에 대한 생각은 수많은 시어로 한국 시문학의 한 지평을 열어줬다. 하지만 작가는 무서웠던 것 같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16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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