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불고 있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 기대
  • 이동진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27 07:30
  • 호수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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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위협하는 공화당 최초의 여성 후보 발레리 페크레스
‘페크레스 현상’이란 신조어 등장까지 만들어내며 돌풍

프랑스 대선이 4개월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이번 대선은 지난 2017년 대선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좌우 양당 구조는 깨졌고, 극우정당이 좌파를 압도하고 있다. 전통적 대결 구도가 무너진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은 마크롱으로 대표되는 중도보수에 아직은 가장 많은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다. 그런데 2017년 무너졌던 보수 세력이 이번 대선에서 다크호스로 떠오를 것이란 기대감이 최근 들어 부풀어 오르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공화당에서 사상 최초로 여성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는 점, 또 이로부터 상당한 돌풍이 불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에선 ‘정통 우파’ 부활의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EPA연합
발레리 페크레스가 12월4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후보 선출 투표에서 승리한 후 양팔을 들어올리고 있다.ⓒEPA연합

좌파진영 분열에 중도-우파의 각축전

2017년 당시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혹독한 국정평가를 받고 임기를 마친 후 프랑스 좌파진영을 대표하던 사회당은 국민의 신임을 잃었다. 여러 좌파 성향 인물이 사회당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프랑스 진보의 흩어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더 큰 붕괴만을 초래했다. 그 여파는 이번 대선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스펙트럼이 넓은 좌파에서만 8명의 대선후보가 이미 출마한 상황이고, 거기에 더해 최근 올랑드 정부 때 법무부 장관이었던 크리스티안 토비라까지 출마 의지를 밝히고 있다. 사회당 대선후보인 안 이달고가 최근 ‘대진보 국민경선’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대다수가 이를 거절했다. 좌파진영이 단합하지 못하는 것은 좌파 내에서도 색깔이 분명히 나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르노블 정치대학 앙토안 브리스티엘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좌파는 비슷한 정책을 공유하는 사회당과 녹색당, 그리고 극좌파 정당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로 나뉜다. 경제정책과 유럽연합(EU) 문제 등을 놓고 두 진영의 시선이 상반되는 가운데 진보 대통합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듯 권력도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다. 진보진영의 불협화음은 우파 정당들에게 기회로 작용한다. 특히 극우정당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지난 2017년부터 마찬가지였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의 여성 대선후보 마린 르펜은 당시 2차 결선투표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정당 창당 후 처음으로 1000만이 넘는 득표수까지 기록했다. 이번 대선 역시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다. 르펜은 물론이고 특히 지난 12월5일엔 ‘프랑스의 트럼프’라 불리는 에릭 제무르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관심을 끌고 있다. 엄격한 이민자 유입 관리와 국방비 대폭 확대 등 국수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는 제무르는 10%대 이상의 여론조사 지지율을 보이며 르펜과 함께 4위권 안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역시 선두싸움은 중도-우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현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마크롱은 아직까지 재선 도전을 선언하진 않았다. 그러나 언론은 이미 마크롱을 ‘대선후보’로 지칭하고 있다. 마크롱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부인하지 않으며 출마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 직간접적으로 출마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번에 출마한다면 재선 도전인 마크롱에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2021년 프랑스의 경제 성적은 준수한 편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로나19 시기임에도 높은 성장률과 낮은 실업률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르몽드 등 현지 언론은 마크롱이 재선에 도전할 경우 이러한 부분이 강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 대단한 변수가 출현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프랑스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 사상 최초의 여성 후보인 발레리 페크레스의 등장이다. 페크레스는 지난 12월4일 공화당의 공식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특히 전통적 보수를 표방하며 프랑스의 국부로 여겨지는 샤를 드골이 만들고 조르주 퐁피두,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등 대통령을 배출한 공화당에서 여성을 대선후보로 선출한 것은 이례적이다. 공화당 첫 여성 후보 선출은 돌풍급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편이다. 프랑스 라디오 방송사 RTL이 지난 2019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인 71%가 2030년 안에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좋게 여긴다’고 답한바 있다.

 

마크롱과의 맞대결에서 58대 42로 앞서기도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뿐 아니라 페크레스 개인에 대한 호감도도 높다. 페크레스는 16세의 나이에 대학입시시험을 치르고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여성이다. 역대 공화당 대통령들 밑에서 정치와 행정을 배웠고, 재정부 장관까지 역임했으며 현재는 일드프랑스 주지사다. 그는 보수적 성향이 짙은 프랑스 정치계에서 오로지 실력과 성과로 인정받는 실력파·행동파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페크레스는 EU 수석대표로 유럽연합 이탈 후속 협상을 지휘한 미셸 바니에 전 외무장관, 거물급 정치인인 그자비에 베르트랑 전 노동보건장관 등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당당히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이번 경선을 통해선 ‘선거에 강한 정치인’이란 이미지까지 얻어냈다.

페크레스는 출마 선언 이후 각종 여론조사 2위를 달리며 1위인 마크롱 대통령을 바짝 위협하고 있다. 차이는 약 5%포인트 안팎이다. 특히 엘라브가 페크레스 선출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마크롱과 페크레스가 결선투표에서 1대1로 대결할 경우 페크레스가 52%의 득표율로 마크롱(48%)을 이긴다는 결과도 나왔다. 영리하게도 페크레스는 대선을 ‘마크롱 대 페크레스’ 프레임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지난 12월11일 파리 5구의 한 대형 극장에서 열린 대선 출정식에서 “이번 대선은 나와 마크롱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각에선 ‘페크레스 현상’이란 말까지 나온다. 공화당엔 지난 2017년 대선후보로 강한 지지를 얻었으나 대선을 2개월 앞두고 터진 가족의 부패 스캔들로 정치적 사망을 선고받은 피용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지지자가 많다. 당시 피용의 인기는 ‘피용 현상’이란 말을 만들어냈는데, 최근엔 페크레스가 “피용 현상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독자적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질 핀셜스테인 프랑스 싱크탱크 ‘장 조레스’ 대표)이다.

프랑스에선 페크레스 현상에 힘입어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과 정통 우파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물론 일각에선 페크레스 현상이 컨벤션 효과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고정 지지층이 약하다는 것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페크레스의 고정 지지층은 50%대 초반이지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마크롱, 마린 르펜 등은 60%를 넘기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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