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말의 힘, 시의 힘
  •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2.01.21 17:00
  • 호수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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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폐국이 마야 안젤루(Maya Angelou)가 새겨진 25센트 동전을 발행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선구적인 여성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미국 여성 쿼터 프로그램 American Women Quarters Program’의 일환인데, 마야를 시작으로 여성을 모델로 5개의 동전이 나올 예정이다. 마야 안젤루는 미국의 흑인 여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며 오프라 윈프리의 멘토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여동생 이름이 마야인데, 마야 안젤루의 이름을 본떠 지은 거라고 한다.

미국의 시인이자 인권 운동가인 고(故) 마야 안젤루(1928~2014)가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 25센트 주화에 새겨졌다고 10일(현지시간) AP통신, BBC방송 등이 보도했다.ⓒAP연합
미국의 시인이자 인권 운동가인 고(故) 마야 안젤루(1928~2014)가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 25센트 주화에 새겨졌다고 10일(현지시간) AP통신, BBC방송 등이 보도했다.ⓒAP연합

199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송하며 마야 안젤루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졌다. 1990년대 말, 캘리포니아의 어느 서점에서 마야 안젤루의 책을 처음 보았다. 매대 한가운데 ‘취임식 시’라는 팻말 밑에 하얀 표지의 작은 시집들이 쌓여 있었다. 양장본 시집 《On the Pulse of Morning》을 들춰보며 나는 놀랐다. 달랑 시 1편으로 시집을 만들다니! ‘취임식 시’라는 희소성, 흑인 여성 시인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에 지갑을 열었다. 그녀의 시집뿐만 아니라 산문집도 사서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마야 안젤루의 시 전집을 주문했고 그녀의 시 두 편을 번역해 훗날 나의 산문집에 소개했다.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마야 여사의 책을 번역·출판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마침 어느 출판사에서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 《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지금은 절판된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은 ‘아칸소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를 출판한다며 내게 추천사를 부탁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마야의 책에 내 이름을 얹는 영광을 누리다니. 번역원고를 읽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밤을 새웠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천연덕스럽게 풀어나가는 재능에 나는 반했다.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해 짐짝처럼 기차에 태워져 아칸소의 할머니에게 보내지는 장면에서 시작해 여덟 살에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당한 성폭행, 이후 실어증으로 말을 하지 않던 마야는 책으로 도피했다.

그녀가 실어증에 걸린 계기가 독특하다. 성폭행 사실을 어렵게 오빠에게 말한 뒤 가해자를 고소했지만, 가해자는 단 하루를 감옥에서 살고 풀려났다. 석방되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는 안젤루의 삼촌들에게 살해되었다. 가해자가 죽은 뒤 마야는 자신의 ‘말’이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해, 말하기를 거부하며 5년간 침묵의 감옥에 갇혀 지낸다. 어린 마야는 독서와 시를 통해 위로받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키웠다. 눈으로만 시를 보던 마야는 어느 교사에게서 “시를 소리 내어 읽지 않으면 너는 시를 사랑하지 않는 거다”라는 말을 들은 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시의 힘, 말의 힘이 정말로 대단하다.

그녀처럼 불안한 유년을 보낸 내게도 시가 위로이며 도피였다. 국민학교 2학년이던가, 교가를 배우다 선생님에게서 ‘돼지 멱따는 소리 내지 말라’고 혼난 뒤 나는 음악시간에 입을 열지 않았다. 노래를 빼앗긴 나는 시를 읽었다. 등·하굣길에 시를 외우고 뒷동산에 올라가 나풀나풀 춤도 추었다.

인종과 피부색을 떠나 세계의 여성들에게 마야 안젤루는 영감을 주는 원천이다. 그녀의 자서전을 읽고 나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오래 뜸 들였던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를 완성했다. 이름 없는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며 나는 새장 밖으로 나왔다. 새는 답을 알고 있어 노래하는 게 아니다. 새는 새장 밖으로 나오려고 노래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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