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과 함께 마음도 고쳐주는 ‘탈북민 잡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2.20 10:00
  • 호수 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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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면과철조망 ⑰] 北 수리공 출신 김학민 서강잡스 대표, 역경 극복하고 성공가도

“아이폰을 돌밭에 떨어뜨려 액정에 빠지직 금이 갔어요.” “카페에서 일하다가 맥북에 음료를 흠뻑 쏟았네요.” 

애플 제품 수리 전문기업인 서강잡스 고객들이 인터넷상에 남긴 리뷰 내용 중 일부다. 상상만 해도 절망적이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모두 해피엔딩이다. 아이폰을 완벽하게 수리받은 고객은 “순식간에 새것처럼 바뀌었다”며 기뻐했다. 맥북 수리를 의뢰한 고객도 “(수리비가 많이 들까봐) 많이 걱정했는데, 내·외부 청소를 통해 간단히 문제가 해결됐다”며 다행스러워했다. 이 밖에 다른 리뷰들 역시 호평 일색이다. 서강잡스에서 빠르고 정확하고 저렴하게 애플 제품을 고쳐줬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남다른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사장님’ 칭찬을 잊지 않았다. 

사실 서강잡스 김학민 대표(36)는 고객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특별하다. 태어나서 20대 중반까지 그는 북한, 그중에서도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의 시골 마을에 살았다. 스마트폰 같은 IT 기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25세였던 2011년 탈북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시기를 김 대표는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세계로 뚝 떨어진 것’이라고 비유했다. 이런 그가 남한 생활 10여 년 만에 최고의 아이폰 수리 전문가 겸 사업가로 변신한 배경이 무척 궁금해졌다. 

ⓒ시사저널 이종현
ⓒ시사저널 이종현

서강대 명물에서 사업가로 

2월11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근처의 서강잡스 사무실에 들어서자 수많은 애플 제품이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수리 작업 중이던 김 대표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목폴라 티셔츠에 청바지, 무테안경까지 애플 창업자이자 스마트폰의 아버지인 스티브 잡스와 똑 닮았다. 작업 공간 바로 앞에는 아예 커다란 잡스 사진을 놓아뒀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인테리어도 우아하고 심플한 게 애플 제품 디자인과 비슷했다. 

‘애플에 대한 사장님의 진심이 느껴진다’는 고객 리뷰가 금방 이해된다. 

“원래 사업의 ‘사’자도 몰랐고, 그저 아이폰 등 애플 제품에 탐닉하는 너드(Nerd·한 분야에 깊이 몰두해 다른 일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였다. 잡스의 자서전을 몇 번이나 읽고 동경하는 ‘잡스 빠’이기도 했다(웃음). 우연한 기회에 순수한 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잡스처럼 주어진 일을 계속 사랑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우연한 기회와 순수한 목적이란 무엇인가.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재학할 때 고장 난 내 아이폰을 직접 고쳤다. 단지 수리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는데, 지켜본 기숙사 룸메이트가 깜짝 놀라며 주변에 소문을 냈다. 곧 너도나도 자기 것 좀 고쳐 달라며 찾아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애플 제품 수리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사례를 받았지만, 돈 벌려고 한 일은 아니었다. 친구들을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애플 제품 수리는 까다롭고 번거롭고 비싼 삼중고(三重苦)로 악명 높다. 코앞에 ‘짠’ 하고 나타난 천재 수리공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자 서강대 애플 유저들은 ‘서강잡스’라 부르며 격하게 환호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SNS 등을 통해 김 대표의 존재가 더 많이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이뤄져온 수리는 어엿한 사업으로 발전했다. 김 대표는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수리 사업에 전념했다. 학교 안팎에서 몰려드는 고객을 기숙사 로비와 강의실, 카페, 편의점 테이블 등에서 맞던 그는 2016년 정식 사무실을 차리기에 이르렀다. 2018년엔 법인을 세우고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매김했다. 

김 대표는 한때 여러 점포를 운영하다가 현재는 본점 한 곳만 남겼다. 밀려드는 투자와 협력 제안도 정중히 거절한다. 시행착오를 겪은 뒤 사업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면서다.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나. 

“서강대 본점의 성업에 자신감을 얻고 이화여대와 홍익대 분점을 열었다. 기반이 튼튼히 잡히기도 전에 섣불리 확장을 감행해 위기를 맞았다. 수리 서비스의 질을 면밀히 관리하기 어려워지고 CRM(고객관계관리) 시스템이 없어 고객 응대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늘어난 수리 물량을 감당하느라 몸은 몸대로 축났다. 최대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두 건만 잘못 처리해도 큰 문제로 불거졌다. 일부 고객과 서로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면서 악명을 떨친 적도 있다. 투자를 받고 투자자들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냈을 땐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더라.” 

지금의 서강잡스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불과 최근 1년 새 벌어진 일이다. 엄청난 타격이었지만, 앞서 이룬 걸 훨씬 뛰어넘는 진보와 혁신을 경험했다. 아무런 준비과정 없이 손재주 하나로 시작한 사업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자본주의나 서비스에 관한 마인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말이다. 대가를 지불한 고객은 좋은 서비스를 제때, 완벽하게 받길 바란다. 이 당연한 사실을 예전엔 깨닫지 못했다. 부족하고 불안한 와중에도 찾고 응원해준 고객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 더 좋은 서비스로 은혜를 갚고 싶다.” 

서강잡스가 성장해온 과정은 김 대표의 인생 행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고향 온성에서도 김 대표는 ‘꼬마 수리공’으로 통하며 명성을 날렸다. 13세 때 이미 동네 사람들의 시계를 수리해 줬고, 17세부턴 못 고치는 전자제품이 없는 전업 수리공으로 활약했다. 그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수리 기술을 일본 서적들을 보면서 스스로 익히고 발전시켜 갔다. 수리비는 대중이 없었다. 방문한 집 사정이 어려워 보이면 받지 않고 돌아오기도 다반사였다. 이웃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돈벌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전자제품을 자주 다루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접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결국 김 대표는 북한 당국에 세 번이나 발각돼 감옥 생활을 했다. 단순 시청 혐의만 받은 두 번과 달리 마지막 세 번째에는 유포죄가 더해졌다. 이웃들의 탄원으로 기적처럼 풀려난 그는 ‘한 번 더 잡히면 인생이 끝나겠다’는 생각에 탈북을 결심했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태국을 경유한 끝에 도착한 대한민국에서 김 대표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확 바뀌어버린 환경에 뚝 떨어져 살아가려니 너무 막막했다”며 “언어부터 사회 분위기, 문화, 배우는 것 등 모든 부분에서 내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1년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절망에 빠진 김 대표를 끄집어올린 건 북한에서부터 알던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스티브 잡스의 전기였다. 김 대표는 책을 두 번 정독하면서 잡스의 철학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빠져들었다. 

서강잡스 사무실 모습ⓒ시사저널 오종탁
서울 마포구 서강잡스 사무실 모습ⓒ시사저널 오종탁

점포 확장하다 위기에 빠지기도 

이후 그는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2년여 동안 공부한 끝에 201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입학하자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학업 수준을 좀체 따라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번에는 학우들이 김 대표를 돕고 나섰다. 너도나도 자원해 개인 과외를 해준 덕에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김 대표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고, 서강잡스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순수함과 선의, 우연과 시련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성장했다. 앞으로의 꿈이 궁금하다. 

“일단 서강잡스를 오래 살아남는 기업으로 만드는 게 당면과제다. 좋은 서비스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굴해 내고 제공해야 가능한 일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비대면 수리 서비스도 고민하며 투자하고 있다. 궁극적으론 전국 애플 제품 수리 업계의 롤모델이 되면 좋겠다. 요즘 전자제품은 단순한 물건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나. 전자제품 너머의 고객 마음을 헤아리며 사업에 진력할 것이다.” 

문득 김 대표가 건넨 명함 뒷면을 봤다. 서강잡스의 로고와 함께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수리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잡스의 주문에 김 대표가 내놓은 대답 같았다.   

북한이 자체 개발한 '평양' 스마트폰 2417 모델ⓒ연합뉴스
북한이 자체 개발한 '평양' 스마트폰 2417 모델ⓒ연합뉴스

■ “북한 휴대전화 사용자 382만 명…앱 개발도 활발” 

북한에서도 어느새 휴대전화 사용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2013년부터 자체 제작하기 시작한 스마트폰이 약혼 예물로 쓰일 정도로 인기를 끄는 중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19년 기준 북한의 이동통신 가입자 수를 382만1857명으로 추정했다. 7000만 명을 웃도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폐쇄적인 북한 사회를 고려할 때 적지 않은 수다. 

공식적인 이동통신 가입자 외에 중국 등 해외에서 들여온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북한 주민도 있어 실제 이용자는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2018년 한 해 동안 탈북한 주민 1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북한에 있을 때 휴대전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62.9%가 그렇다고 답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북한 각지에서 스마트폰 등 휴대전화가 여성에게 약혼반지를 대신하는 예물로 쓰이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고 2019년 보도했다. 

북한에서 스마트폰은 ‘지능형 손전화기’라고 불리는데, 2013년 ‘아리랑’과 ‘평양’ 이후 계속 새 기술을 탑재해 출시되고 있다. 최근 개발된 제품 대다수에는 얼굴인식 기능까지 넣은 것으로 전해졌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스마트폰 판매는 북한 당국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하다. 양대 브랜드인 ‘아리랑’과 ‘평양’의 최신 모델 가격이 각각 600달러, 700달러 선이다. 평양 4인 가족의 최저생활비가 월 100달러 정도임을 감안하면 초고가 제품인 셈이다. 

북한 스마트폰의 경우 일반적인 이용 방식으로는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다. 심(SIM) 카드를 꽂아 내부 인트라넷에만 접근하게 했다. 통신 내용은 당국이 자동으로 기록해 3년간 보관하며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조회할 수 있다. 수리 등 A/S 시스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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