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단일화 결렬의 책임을 두고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간 책임 공방이 격화하고 있다. 그 중심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거친 언사가 있다. 이 대표는 ‘고인 유지’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데 이어, ‘국민의당 내 배신자’ 프레임을 꺼내들며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에 대한 조롱을 이어갔다. 당 안팎에선 이 대표의 언사 수위가 금도를 넘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 대표와 안 후보 사이 신경전 이면에는 뿌리 깊은 ‘악연’이 있다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평가다. 2012년 무렵 비슷한 시기에 정치를 시작한 두 사람은 같은 당에 몸 담은 적도 있지만, 수차례 선거를 치른 뒤엔 사이가 완전히 어그러졌다. 두 사람 간 해묵은 감정의 앙금을 해소하지 않으면 야권 단일화를 재개를 기대하긴 어렵단 관측도 나온다.
野단일화판 뒤흔드는 李의 조롱
이 대표는 23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안 후보를 겨냥해 ‘속 좁은 사람’이라고 지칭하며 야권 단일화 결렬의 책임을 물었다. 이 대표는 “(안 후보는) 속 좁은 사람이고 우리 후보(윤석열)은 통 큰 사람이다. 통 큰 사람과 속 좁은 사람이 만나면 복장 터진다”라고 말했다. “국민의당 관계자들이 국민의힘 측에 ‘안 후보를 접게 만들겠다’는 제안을 해온 적도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국민의당 내에 배신자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단일화 물밑 협상’을 줄곧 부인해 온 안 후보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려는 취지로 풀이된다.
이 대표는 전날에도 페이스북에 안 후보가 선거 유세 현장에서 “윤석열 후보가 단일화 겁나서 도망쳤다”고 말한 기사를 공유하며 “‘ㄹㅇㅋㅋ’ 네 글자만 치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ㄹㅇ’은 ‘진짜(리얼‧real)’를 뜻하는 인터넷 신조어로, 사실상 단일화 결렬의 책임을 따지는 안 후보의 말을 조롱한 의미다.
이 대표가 국민의당 유세버스 사고를 비꼰 것도 화근이 됐다. 안 후보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대선 완주를 하겠다”고 하자, 이 대표는 “고인이 불시에 돌아가셨는데 유지를 어디서 확인하나. 국민의당 유세차량 운전자들은 유서를 써놓고 가시나”라고 했다. 이에 안 후보는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의 해당 발언은 단일화 협상이 결렬된 주요 원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李와 安의 ‘10년’이 ‘남보다 못한 사이’ 되기까지
안 후보를 향한 이 대표의 거친 언사는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두 사람은 2012년 무렵 정치에 입문한 동지였지만, 2016년 총선 당시 노원병에서 맞붙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공천 파동을 겪으며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정치권에선 이 대표를 ‘안티(Anti) 안철수’의 선봉장에 선 인물이라고도 평가한다.
이 대표가 쏟아내는 안 후보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안 후보의 생각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안 후보의 정치적 결정이 대부분 주변 인사들과의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질뿐더러, 결정 자체도 납득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 대표가 이 같은 평가를 굳히게 된 계기는 4년 전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표와 안 후보는 각각 바른정당과 국민의당 소속으로 손을 맞잡고 바른미래당을 출범, 서울 송파을과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준비했다. 이 대표는 노원병 당협위원장을 맡을 만큼 지역 기반이 있는 인사였던 터라 무난히 공천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안 후보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지역구이기 때문에 국민의당계가 공천되는 게 맞는다는 주장이었다. 국민의당계로 추천된 김근식 교수가 경선 직전 스스로 사퇴하면서 결국 이 대표가 출마를 하게 됐지만, 바른미래당은 당시 지방선거에서 전멸하는 대형 패배를 당했다.
같은 시기 안 후보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자유한국당 소속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단일화 행보에 나섰다가 다시 독자 출마로 방향을 틀었다. 바른정당계 인사들은 이 같은 안 후보의 행보가 독단적이었다고 회상한다. 이 대표가 ‘안잘알(안철수를 잘 아는 사람들)’을 자처하면서도 “안 후보는 야권 전체로 볼 때 A급 X맨” 등의 평가를 내린 것은 이 같은 누적된 갈등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반면 국민의힘 안팎에선 이 대표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안 후보에 대한 이 대표의 적개심이 야권 단일화 협상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이 만든 플랫폼 ‘청년의 꿈’에서 “(이 대표의 조롱이) 좀 심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동시에 국민의힘은 이 대표의 행보와는 별개로 안 후보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며 단일화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김재원 최고위원은 “단일화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고, 서병수 의원은 전날(22일)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진구 부전시장 인근에 있던 안 후보의 선거유세 현장에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