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30분 “죽음을 관찰하고 대결했던 시간”
  • 김호정 중앙일보 기자 (wisehj@joongang.co.kr)
  • 승인 2022.03.05 14:00
  • 호수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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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이승무 “아버지는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표정이셨다”
살아있는 동안 그토록 바라던 평화로운 죽음 맞이…의식 지닌 채 죽음 관찰

“네, 편히 잠드셨어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주(喪主)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살아있는 동안 그토록 바라던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이어령 선생의 빈소였다. 나오니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이어령 선생을 수십 년간 스승처럼 모셨던 이다. 그가 말했다. “정말 평화로웠어요. 화상통화로 손녀들하고 마지막 ‘빠이빠이’도 하셨다잖아요.”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다시 빈소에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손녀들과 화상 ‘빠이빠이’를 나눈, 이 시대 지적 거장의 죽음. 이 이야기는 자세해야만 했다. 거대한 지성의 탑을 쌓고, 복잡한 지적 여행을 다녔던 그 삶의 마지막에 따뜻하고 안온한 사랑의 인사가 있었다는 뜻이니. 그제야 들여다보니 선생의 영정 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합뉴스
3월2일 오전 종로구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연합뉴스

시대의 지적 거장, 따뜻하게 세상과 작별

큰아들 이승무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영상원 교수이고 영화감독이다. 그가 전한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한 시간은 말보다는 장면에 가까웠다. 2월26일 오전 11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두 손녀는 할아버지의 친병(親病)을 알고 있었다. 최근 기력이 부쩍 사그라들었다는 것도 알았다. 둘은 이날 우연히 만나 할아버지에게 영상전화를 걸었고, 그 시간 이어령 선생은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간단한 의사표현만이 가능한 상태. 하지만 화면에 나온 두 손주의 얼굴을 보고는 힘없는 한 손을 낮게 들어올렸다. 야윈 얼굴에 미소가 번진 채로, 그는 웃으며 작별했다. ‘빠이빠이.’ 아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이후 가족과 함께해온 목사를 청했고, 예배가 열렸다. 30분이 지났다. 그때부터 선생의 숨은 더 희박해졌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어 가신다.” 두 아들과 며느리가 곁에 모였다. 아들은 그때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목격한다.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걸 본 듯했고, 어찌 보면 황홀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뚫어져라 한곳을 바라보셨기에 나도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30분 동안이었다.” 그는 이 30분을 “아버지가 죽음과 대결했던 시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몇 년 전 발견된 병과 싸우는 대신 함께 살았던 그의 대결이 죽음을 물리치기 위해서였을 리는 없다. 선생이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려 했다면, 그 이유는 죽음을 관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만일 그에게 말할 힘이 남았다면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을 전했으리라. 조금이라도 쓸 기력이 있었다면 죽음의 실체를 전하는 문장이 남았으리라.

죽음에 대한 평생의 호기심을 충족한 선생은 마지막 순간에 기쁘게 패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숨은 사라졌다. 아들 이승무 교수는 아버지의 상반신을 일으켜 안았고, 마지막 숨결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다시 숨을 쉬시는 것 같아서 모였던 이들이 ‘아버지! ’ ‘아버지!’ 하고 불렀다. 하지만 더는 숨을 쉬지 않으셨다. 마지막이었다.” 2월26일 낮 12시30분. 선생의 마지막 숨은 놀라울 만큼 가벼웠다고 했다. 부드러운 숨으로, 선생은 사뿐히 떠났다.

나는 1월18일에 봤던 선생의 가벼워짐을 떠올렸다. 그의 서울 평창동 집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다만 하얀 병원침대 하나가 집필실에 들어와 있었다는 점만 달랐다. 그는 걸음을 도와주는, 바퀴 달린 작은 보행기를 밀며 나와 인터뷰를 위해 도착한 일행을 맞았다. 시끄러운 바깥세상에서 온 우리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선생은 부드러운 환자용 가운을 입고 유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인터뷰는 30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의 기억은 5분 단위로 기록할 정도로 정확했다. 기력이 없어 30분만 내어주겠다던 그는 90분 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오래간만에 성한 사람처럼 떠들었다”며 웃었다.

다시 거슬러 2021년 8월에는 죽음 때문에 공포에 질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서울대학교 후기 졸업식의 축사 녹화를 취재하기 위해 선생을 만났다. 모르는 사람의 기침 한 번으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우리가 뒤집어쓴 마스크를 그는 관찰했다. 이항 대립(二項 對立)의 논리가 한 장의 마스크로 허물어졌다고 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쓰는 마스크가 사실은 나로부터 남도 지키기 위해 쓴 것이 아니냐!”고 외쳤다. 이기(利己)와 이타(利他)가 대립한다는 생각은 이제 끝났고, 오로지 생명의 가치를 깨닫는 시절이라고 했다. 바이러스로 인한 인류의 죽음만을 바라보던 우리를 그는 그렇게 안심시켰다. 이 연설을 거의 3시간 동안 녹화했는데, 녹화를 마친 그는 또 한번 기력이 떨어져 한동안 누워서만 지내야 했다고 했다.

 

서울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은 이어령의 분신

선생은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고향의 보리밭에서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여섯 살부터 그는 죽음을 지켜보는 자였다. 태양이 눈부셨던 조용한 낮에 갑자기 흐른 눈물. 그는 이 눈물이 죽음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고 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고요한 가운데 굴러가던 굴렁쇠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삶이 찬란했던 덕분이고 동시에 죽음이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이어령 선생이 본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차원이었다.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삶과 죽음이었고,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의 모태로 돌아가는 일”이 죽음이었다. 그래서 자궁(womb)은 무덤(tomb)과, 수의는 포대기와 그렇게 닮아있다는 것이다.

않았기에 관찰했고, 그렇게 죽음의 모습을 알아내 두려워하는 이들을 안심시켰다. 끝까지 죽음을 정면으로 보며 떠났다. 의식이 혼미할 때 떠나고 싶지 않다며 진통제도 줄였다. 아들 이승무는 “의식이 사라지고서야 세상을 떠나신다고 들었기 때문에 며칠 더 계실 줄 알았다. 그렇게 정신이 또렷하실 때 떠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삶에는 따뜻하게 작별하고,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숨졌다. 이어령다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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