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이면이 보여주는 그 사회의 권력관계 [남인숙의 귀여겨듣기]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26 12:00
  • 호수 1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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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 허락되나

벚꽃의 계절이다. 이 무렵 벚나무를 심어놓은 공원에 가면 사람들이 웃는 표정을 쉽게 볼 수 있다. 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사람들의 미소가 일견 당연하게 보이지만 실제 생활에서 웃는 표정은 생각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웃는다는 것은 231개 근육이 움직이고 혈관이 이완되며 쾌감 호르몬이 분비되는 좋은 활동이지만 일상에선 알맞은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보내고 집에 와서 쉬다가 잠드는 평범한 사람들은 한 번 웃어볼 일도 없이 며칠을 훌쩍 보내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이런 웃음은 남이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을 볼 때도 자신이 웃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간접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일을 직접 하는 것 같은 신체반응을 보이게 하는 우리 뇌의 거울 뉴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좋은 기분’을 위해 곧잘 대가를 지불하는 현대인에게는 미소도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이 미소를 여성 전담 영역으로 미루어 두고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소를 여성에게 전담화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권력 서열에서 밀려난 대다수 남성의 희생도 요구하게 돼있다. 사진은 한 백화점 본점 직원들이 고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뉴시스
미소를 여성에게 전담화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권력 서열에서 밀려난 대다수 남성의 희생도 요구하게 돼있다. 사진은 한 백화점 본점 직원들이 고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뉴시스

미소를 ‘외주화’하는 사회

미국의 심리학자 하커와 켈트너는 2001년 여자 대학생들의 졸업사진 미소를 분석해 30년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추적 연구했다. 그 결과 ‘진실된 미소’로 불리는 뒤센미소를 가진 여학생들의 결혼 만족도가 월등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웃음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증명하는 근거로 여전히 자주 인용되는 연구지만,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명제로 만족하기에는 뒤끝이 쓰다. 연구 대상이 하필 전원 여성이었다는 점, 그리고 행복의 척도가 결혼 만족도였다는 전제가 연구 결과에 대해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더 능숙하게 미소를 제공할 수 있는 여성은 아마 결혼 제도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여 년 전에는 미소가 인생의 질을 높여준다는 이 연구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큰 무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에게 결혼 만족도와 인생 만족도가 동의어라는 가정은 개인의 자아가 팽창된 요즘의 시각에서 볼 때 한참 부족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무의식은 아직도 미소를 ‘여성 전용’으로 카테고리화하고 있다. 일터나 각종 커뮤니티에서 잘 웃지 않는 여성은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미소를 요구받기도 한다. 웃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자발성 없이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한다면 인지부조화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가 장점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웃음을 약자에게 외주를 주는 것은 권력자들의 특권이었다. 쉽게 웃어 보이는 것은 귄위를 떨어뜨린다고 여겨 가장 신분이 비천한 광대의 재주를 보는 특수 상황에서만 웃거나, 웃음을 파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통해 구매했다.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이 사회에서는 아직도 남성의 웃음만큼은 단무지나 물만큼도 ‘셀프’가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미소를 여성의 영역으로 떠넘기는 남성들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웃는 것이 관계나 심신 건강에 좋다는 말을 사방에서 들어도 그런 정보는 생존 본능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권력지도에서 미소는 상위 서열에게는 관용, 하위 서열에겐 굴종의 신호로 해석된다. 우리 사회의 남성들이 소위 ‘남성적 사회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미소를 잃어가는 것은 그것을 도구로만 사용하는 경험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서비스직 종사 남성, 여성보다 5배 ‘우울’

미소가 업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5배 비율로 가면성 우울증을 더 많이 겪게 된다고 한다. 가면성 우울증, 혹은 가면성 증후군은 표현되지 않는 우울증을 의미한다. 항상 밝은 표정으로 매끄러운 사회생활을 유지해 나가지만 우울감이 드러나지 않아 발견이 늦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해 치료가 늦어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임상에서는 친절과 밝은 태도를 강요받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이런 가면성 우울증에 남성들이 더 취약하다는 사실은 그들이 미소를 상품으로 제공하는 일에서 훨씬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미소를 여성에게 전담화하고 자본화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권력 서열 최상층에서 밀려난 대다수 남성의 희생도 요구하게 돼있다. 여성들이 별개의 존재로 분류되고 여성만의 요소가 대상화될 때 반드시 독점과 배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미소와 같은 약자적인 요소를 섣부르게 드러내면 자칫 서열이 떨어져 무리에서 뒤처질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긴장된 삶을 살게 되는 순서다. 알파맨(공부, 운동, 대인관계, 리더십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남성)과 베타맨(확고한 역할 모델 부재로 갈피를 못 잡는 현대 남성을 일컫는 말)이 극명하게 구분되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안정된 정서로 살기 어렵다. 알파맨조차 자신의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같은 맥락이지만 다른 이유로, 미소를 전담 받은 여성들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전술한 이유들 때문에 어떤 남성들은 여성들의 미소를 본능적으로 대상화하곤 한다. 자본과 함께 미소가 ‘패키지’화되길 강요하거나, 미소 자체가 여성이 자신의 대상화를 허용하는 신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과는 반대로 좀 더 상냥하도록 하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여성들은 습관으로 굳어진 웃음을 통제하지 않으면 위험하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단순 호의로 미소를 지었다가 경찰서에 드나들 만한 일을 몇 번 겪거나 목격하는 여성들은 점차 미소를 잃어간다.

웃음의 미덕과 미소에 대한 찬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남성, 여성, 누구도 안심하고 웃을 수 없는 게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웃음은 누구나 공기처럼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채워져 있는 권위주의의 족쇄를 의식하고 풀어낼 때, 마음껏 서로를 위해 웃어줄 수 있는 공동체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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