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심석희, 웃을 수 없던 안타까움
  • 김종수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16 16:00
  • 호수 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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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파란만장한 희비 극장

2022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쾌거로 대한민국에 다시금 쇼트트랙 열풍이 부는 가운데 메달을 딴 선수 사이의 희비가 주목받고 있다. 대표선수로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것은 그 자체로 더없이 기쁠 일임에도 이런저런 사연이 섞이면서 마음껏 웃는 자, 완전히 웃지 못하는 자, 웃을 수 없는 자 등으로 나뉘는 모습이다.

쇼트트랙 여자대표팀은 4월11일(한국시간) 캐나다에서 열린 대회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특히 간판스타 최민정(24·성남시청)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최민정은 500m를 제외한 여자 1000m와 1500m, 3000m 계주, 3000m 슈퍼 파이널 등 총 4개 종목에서 정상에 섰다. 랭킹 포인트 107점으로 캐나다의 킴부탱(84점)을 제치고 2015년, 2016년, 2018년에 이어 통산 네 번째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야말로 이번 대회 최고의 스타였다.

ⓒEPA 연합
4월10일 최민정(가운데)이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뒤 2, 3위 선수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EPA 연합

3000m 계주에서 극적 대역전 이끈 최민정 

최민정은 심석희(25·서울시청)와 김아랑(27·고양시청), 서휘민(20·고려대)과 팀을 이뤄 여자 3000m 계주에서 우승을 이끌었다. 계주는 한 사람만 잘해서는 이기기 힘들다. 팀원 모두 힘을 합쳐야 성적을 낼 수 있다. 최민정은 3000m 계주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그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승선을 4바퀴 앞둔 시점에 심석희가 이탈리아 선수와 접촉하면서 뒤로 처졌다. 앞선 캐나다, 네덜란드와 격차가 있어 역전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최민정이 있었다. 최민정은 폭발적인 스피드로 거리를 좁히더니 마지막 코너에서 캐나다와 네덜란드 선수들이 살짝 접촉하면서 주춤하는 사이 한꺼번에 두 선수를 추월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며 대역전을 이뤄냈다. 2위 캐나다에 0.03초, 3위 네덜란드에 0.09초 앞선 기적의 드라마였다.
 축제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밝은 표정으로 시상식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도 했다. 선수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날은 없다. 최민정은 물론 함께 레이스를 펼친 서휘민, 김아랑 등도 환한 얼굴로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심석희만은 굳은 표정이었다. 동료들이 환한 표정으로 서로의 목에 메달을 걸어줄 때도 손에 쥔 메달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색했다. 동료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맏언니 김아랑이 서휘민을 향해 옆에 있는 심석희에게 메달을 걸어주라고 말했다. 그제야 심석희는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심석희는 서휘민을 향해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최민정은 다른 선수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순간에도 심석희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속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선 의아한 장면이다. 심석희의 실수로 금메달을 따지 못할 상황을 최민정이 메워준 미안함이라고 하기엔 온도 차가 너무 컸다. 더군다나 팀 스포츠 아닌가. 모든 일에는 사연이 있다. 이들에게도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시상식에서의 어색한 장면은 팬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그 순간만 보면 마치 심석희가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다. 사실은 다르다. 동료들 입장에서는 심석희는 가해자다. 지난해 심석희가 대표팀 코치와 주고받은 최민정, 김아랑과 관련된 내용의 모바일 메시지가 공개됐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강도 높은 욕설은 물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최민정을 상대로 이른바 ‘고의 충돌’을 의심할 만한 내용이 포함됐다. 어찌 보면 선수 자격 영구박탈은 물론 경찰 조사까지 받을 만한 사안이었다. 거기에 동료선수 불법 도청 의혹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선수 자격 2개월 정지 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2개월 징계가 해제되면서 지난 2월 대표팀에 복귀했다.

이 사건은 심석희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심석희는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로 많은 동정을 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성추행, 성폭행 등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며 전 국민적인 위로가 쏟아졌다. 그를 응원하던 팬들에게 이 사안은 큰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안타까웠던 피해자가 한순간에 가해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가 동료들에게 행했던 부적절한 모습과 별개로 엘리트 스포츠 구조 속 피해자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겠지만 가해자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이전의 동정론도 가려졌다. 강도 높은 역풍이 쏟아졌다.

심석희도 자신을 향한 비난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진천선수촌에 입촌할 당시에도 수없이 망설이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 했다. 기다리던 기자에게 편지를 통해 사과문을 전하는 등 심적으로 많은 고뇌를 겪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팬들의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스포츠머그 유튜브 제공
쇼트트랙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4월11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계주에서 우승한 뒤 금메달을 수상하고 있다. 다른 선수들은 밝게 웃고 있지만 심석희 선수(맨 왼쪽)만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스포츠머그 유튜브 제공

비난과 반성은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몫

시상식 장면에 대해선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성토의 목소리가 여전한 가운데 기회를 줘야 한다는 동정론도 일고 있다. 연맹 관계자는 “가장 기쁜 날 아쉬운 장면이 연출돼 죄송한 마음이 크다. 모두 열심히 훈련해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지만 함께 껴안고 웃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김아랑, 최민정, 심석희 선수 등에 관한 이야기 등은 언론을 통해 워낙 자세히 보도돼 더 밝힐 것도 없다”고 했다.

심석희는 한순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해온 동료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 이로 인해 팬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다. ‘고의 충돌’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문자 등으로 타인을 ‘뒷담화’한 것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를 믿고 의지해온 동료들이 받은 상처와 절망감 또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 분명하다. 확실한 점은 피해를 본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가해를 한 것만큼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감수해야 하는 무게 또한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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