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약발도 이제 안 통하나
  • 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sisa518@sisajournal.com)
  • 승인 2022.06.02 07:30
  • 호수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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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시행령 이후 사망자 수 오히려 증가
공사 대금 ‘쪼개기’, CSO 둬 책임 전가 등 각종 꼼수도 난무

5월23일 울산의 한 장례식장에서 에쓰오일 협력업체 직원인 고(故) 김윤수씨의 영결식이 있었다. 유족들은 에쓰오일이 안전조치도 하지 않고 작업을 시켜 가스가 폭발해 김씨가 목숨을 잃었다며 오열했다. 산재보고서에는 기억되지 않는 죽음이 또 하나 기록됐다. 동료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있기는 하냐며 정부와 에쓰오일을 원망했다.

“피해를 입은 모든 분과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린다. 고인과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와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 에쓰오일의 후세인 알-카타니 최고경영자(CEO)가 5월20일 울산공장에서 발표한 사과문 내용이다.

에쓰오일 울산공장에서 1명이 숨지고 9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형 폭발 사고가 일어난 건 5월19일 오후 8시5분. 사고는 부탄을 이용해 휘발유 옥탄값을 높이는 첨가제인 ‘알킬레이트’ 추출 공정의 정기보수작업(Shut Down)을 마치고 시운전을 하던 중 발생했다.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수십m 높이로 치솟았다. 그 여파로 10~20km 떨어진 울산 시내까지 진동이 전해지며 놀란 주민들의 신고가 잇따랐다. 특히 공장과 직선거리 1km 내의 울주군 거남마을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당시 공정에 사용된 부탄은 인화성이 높은 가스인 탓에 불길이 잡히기까지 20시간 동안은 공포 그 자체였다.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해 조사 중이다. 경찰은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수사에 착수했고, 소방본부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의거해 공사중지명령을 내렸다. 시사저널이 에쓰오일 관계자와 숨진 김씨 동료, 현장 작업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이번 사고는 에쓰오일의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인재(人災) 정황이 속속 나오고 있다. 

5월19일 울산 온산공단 에쓰오일 울산공장에서 폭발로 대형 화재가 발생해 불길이 치솟고 있다.ⓒ연합뉴스

에쓰오일 폭발 사고, 인재 정황 속속 드러나

당시 상황은 이랬다. 5월19일 오후 2시, 에쓰오일은 시운전을 위해 컨트롤 룸 자동제어장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부탄가스 탱크 밸브가 작동하지 않아 협력업체에 긴급 출동을 요청했다. 오후 3시30분, 숨진 김씨와 협력업체 직원 11명은 현장 투입 준비에 들어갔다. 부탄가스 탱크의 밸브를 수리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8시, 이들은 높이 30m의 가스탱크에 직접 올라갔다. A씨는 “대형 철판 보닛을 20cm 정도 열고 밸브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쐐~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스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B씨는 “당시 밸브 한 개가 열려 있었고,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고착 상태였다”며 “이미 탱크 안으로 가스가 계속 유입되고 있던 상태였는데 안전수칙의 기본인 가스 차단도 하지 않고 작업을 시킨 게 폭발 사고의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C씨와 D씨는 작업 시작 전에 밸브가 열려 있는 상태의 사진을 시사저널 취재진에게 보여주며 “수도꼭지를 열어두면 물이 나오듯이 밸브가 열려 있으면 가스가 나오는 건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오후 8시55분, 위험을 감지한 에쓰오일은 대피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우주발사체가 솟아오르듯 동시다발적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고, 가스 냄새가 진동하면서 대형 폭발로 이어졌다. 단 3∼4 초 만에 모든 게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A씨는 “사고 당시 에쓰오일 계기팀 관계자들이 컨트롤 룸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시사저널에 전했다. 5월20일 0시20분, 소방본부는 폭발 당시 튕겨져 나간 김윤수씨가 사고현장에서 20m 떨어진 곳에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번 사고는 인재 가능성이 높은 정황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회사 측은 사고 원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협력업체는 컨트롤 데이터에 모든 게 기록돼 있다며 에쓰오일의 적극적인 원인 규명을 촉구했다.

앞서 4월20일에는 SK지오센트릭 올레핀 공장에서 탱크 폭발로 2명이 숨졌다. 같은 달 2일에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폭발 사고로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울산 본사에는 산재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노조는 “1972년 창립 이후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 473명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추모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울산공단에서 160건의 폭발·화재 사고로 22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하지만 중대재해방지법이 시행된 올해는 벌써 4명이 폭발 사고로 숨졌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약발을 받지 못하거나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에쓰오일 폭발·화재와 관련해 21개 울산 지역 사회, 노동단체, 정당 등이 참여한 ‘중대재해 없는 울산 만들기 운동본부’가 5월24일 회견을 열고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중대재해 없는 울산만들기 운동본부 제공

“법령 개정으로 경영자 안전의무 더 명확히”

중대재해처벌법은 1월27일부터 시행됐다.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나 대표이사가 최소 1년 이상 징역, 10억원 이하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약발’을 받지 못한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올해 1월29일 ㈜삼표산업 양주사업소에서 토사 더미가 무너져 작업자 3명이 매몰돼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첫 번째 적용 대상이었지만, 시정 조치가 미흡했다. 고용노동부가 특별 감독한 결과 103건의 법 위반 사항을 시정 조치하지 않았다. 

많은 기업이 ‘1호 처벌 대상’이 되는 걸 피하려고만 했을 뿐 산재 사고 예방에는 소홀했다는 지적이 많다. 임우택 경총 안전보건본부장은 5월16일 국민의힘 노동위원장인 박대수 의원이 주최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00일 성과와 과제' 토론회에 참석해 "1월27일 법 시행 후 4월29일까지 50인 이상 제조업의 경우 지난해 같은 분기 19명에서 31명으로 사망자가 오히려 늘었다"고 말했다.

재계는 산재 감소 효과가 없다는 점을 부각하며 시행령 개정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는 기업들이 예방보다 처벌을 회피하는 데만 급급해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산업연합포럼(KIAF)이 최근 295개 업체를 대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104개 업체(35.3%)가 신규 채용 축소, 노동의 기계화를 고려하고, 75개 업체(25.4%)는 사업 축소나 철수를 계획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태생부터 모호한 규정 등으로 우려가 많았다. 현장의 공사 대금 ‘쪼개기’는 물론, 최고안전책임자(CSO)를 둬 사업주의 중대재해 책임을 덜려는 등의 각종 꼼수가 난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새 정부는 법령 개정으로 경영자의 안전의무를 명확히 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중대재해처벌법이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지 주목되고 있다.  

매년 4월28일은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진 올해 4월에도 한 달 동안 노동자 73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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