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유럽…미소 짓는 크렘린궁 [오은경 기고]
  •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6.05 10:00
  • 호수 17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평화파’ 프랑스·독일과
‘정의파’ 영국·폴란드 등 대립각…푸틴은 유럽의 분열 즐기는 모습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기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유럽은 전쟁 초기에 안보 위기를 공유하며 일시적으로 통합되는 듯했지만, 전쟁 출구전략을 놓고는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럽의 분열을 노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노림수가 먹혀들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EU(유럽연합) 핵심 국가들은 협상을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평화파’의 선봉에 섰다. 적극적인 ‘휴전 중재’에 나서고는 있지만 전쟁 후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놓고 “단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는 우크라이나를 향해 “일부 양보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치러야 할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3월24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존슨 영국 총리(오른쪽)와 나토 본부에서 대화하고 있다. 그 뒤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보인다.ⓒAP 연합

젤렌스키도 우호적이지 않은 佛·獨에 반감

푸틴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고수해 오고 있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전쟁이 나기 전부터 ‘핀란드화’ 해법을 푸틴에게 제시하는 등 유화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회복이나 주권보다는 유럽의 평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푸틴을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핀란드화 해법은 우크라이나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지 않는 대신 서방과 교류할 수 있는 독립적 지위를 보장해 준다는 내용인데, 최악의 군사충돌을 방지해 보자는 취지이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에는 굴욕적인 방식이라 우크라이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도 마크롱은 푸틴에게 식량 위기를 피하기 위해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을 허용하고 우크라이나 수출항인 오데사 봉쇄를 풀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하지만 푸틴은 보란 듯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어주면 곡물 수출을 허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어 오히려 푸틴의 기만 살려주었다는 반감을 사고 있다.

독일 숄츠 총리의 경우, 메르켈 전 총리가 재임 당시 추진했던 강력한 탈(脫)원전 정책의 여파로 전쟁이 나게 되었다는 자국 내 비판 여론에 고심하고 있다. 그는 메르켈이 추구했던 대외 경제정책의 핵심을 확고하게 거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숄츠 총리도 처음에는 메르켈의 정책을 존중하려 했지만 러시아의 본성을 깨닫고 이를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숄츠는 당초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미온적 입장으로 국제사회의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노르트스트림2 건설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음에도 러시아로부터 이를 통한 천연가스 수입을 포기하면서 나토와 유럽연합의 통합된 목소리를 내는 데 힘을 보탰다.

실제로 숄츠 총리는 ‘무기 수출 불가’ 원칙을 바꿔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와 지대공 미사일 등 살상용 무기를 제공하고 자국 국방력 증강에 연간 1000억 유로(약 137조7000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에너지 제재에는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숄츠 총리는 “유럽의 난방·이동·전력·산업 등 모든 분야에 에너지가 필요한데 러시아 의존도가 높은 독일 에너지 수급 상황에서 지금 진퇴양난에 빠져있다”며 곤혹스러운 입장을 드러내왔다.

‘평화파’를 주도하는 프랑스와 독일의 행보를 지켜보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두 나라가 예전부터 자국에 그리 협조적이 않았다는 반감을 갖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독일 메르켈 전 총리, 프랑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반대한 탓에 전쟁이 촉발됐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최근 휴전 촉구 입장으로 선회 조짐

반면 “러시아가 이번 기회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전쟁을 계속해서 무찔러야 한다”는 ‘정의파’는 영국과 폴란드, 그리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구(舊)소련 국가인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이 주도하고 있다. 특히 소련에 대한 경험이 있는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어떻게 믿느냐”며 강경한 태세다. 이들은 대러 경제 제재가 막 효과를 내고 있으며, 앞으로 시간을 들여 더 좋은 무기를 더 많이 지원하면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존슨 영국 총리는 처음부터 한결같은 목소리로 강경론을 펼쳐오고 있다. 그의 주도로 여러 반(反)러 제재안을 통과시켰으며 러시아를 유엔안보리에서 퇴출하자는 요구까지 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깜짝 방문해 장갑차 120대 등 추가 경제 및 무기 지원을 약속하는가 하면, “세계가 러시아 석유와 가스 의존에서 벗어난다면 푸틴 대통령의 돈줄을 끊고 그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기고문을 통해 서방국가들이 2014년 푸틴의 크림반도 병합 당시 이를 묵인한 끔찍한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기도 했다. 존슨 총리는 개전 이후 대공·대전차·대함 미사일에 이어 장갑차까지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며 서방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활발하게 무기 지원을 하고 있다.

전쟁의 출구전략을 두고 유럽에서 분열이 나타나면서 국제사회 시선은 미국으로 쏠리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지만, 미국 내부에서도 우크라이나에 ‘명확한 선’을 일러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도 4월24일 키이우 방문에서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도와야 한다”고 했다가, 5월13일 러시아 국방부 장관과의 통화 후에는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미국의 지원 없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지속 수행하기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설상가상으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5월23일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 연설은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선은 개전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라는 것인데, 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역을 비공식적으로 통제했던 상황을 뜻하는 것으로 우크라이나 쪽엔 실질적인 영토 포기를 의미한다.

여기에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까지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반대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유럽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나토 회원국인 터키는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외국 군함에 대한 흑해 진입 통제권(몽트뢰 협약)을 활용하면서 친서방 행보를 보였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터키 안보의 아킬레스건인 쿠르드노동당(PKK) 지원을 거론하며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는 강경한 태세인데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

전쟁을 끝내는 것과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 중 무엇이 더 유리한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전쟁 장기화가 러시아 국민에게 피로감을 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유럽의 분열이 러시아 입장에서 나쁠 게 없다는 분석도 있다. 즉 유럽의 분열이 결국엔 푸틴에게 전쟁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