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다시 월드컵을 기다리며
  • 최영미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2.06.17 17:00
  • 호수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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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러워 어디로 숨고 싶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서울 상암구장에 몰래 잠입했다가 청와대 경비대장에게 딱 걸려, 혼이 난 적이 있다. 무덤까지 갖고 갈 비밀이라 내가 펴낸 축구산문집에도 쓰기를 주저했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여기 털어놓으련다. 열광적인 축구팬이었던 나는 상암구장의 잔디밭을 내 발로 밟아보고 운동장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알고 싶었다. 상암에서 월드컵 경기가 열리지 않는 어느 날 경기장에 도착해 경비원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어찌 어찌하여 (내가 어떻게 출입허가를 얻는 데 성공했는지 오래전 일이라 나도 잊었다. 신문에 ‘축구에 관한 글을 기고하는 작가’라는 허명을 팔았을 게다) 운동장 한가운데 섰다.

곱게 손질된 잔디밭은 아름다웠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관중석을 둘러보다 VIP석 근처에서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쳤다. 덩치가 어마무시한 개가 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뛰었다. 나는 개를 아주 무서워한다. 며칠 뒤 한국팀의 경기를 관전할 김대중 대통령의 신변안전을 위해 경기장을 둘러보던 청와대 경비대장 옆에서 거대한 개가 혀를 날름거리며 날 내려다보았다.

관중석에서 내려온 그는 날 노려보며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야?” 묻는 그의 기세에 질려 뭐라고 답을 못 하는데, 내 옆에 있던 사람 좋은 경비원이 (그는 내가 구장을 출입할 때부터 동행하며 라커룸 등 시설을 안내했다) “시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시인’을 성이 ‘시’이고 이름이 ‘인’인 사람인 줄 안 경비대장에게 내 주민등록상의 이름을 말해 주고 한참 뒤에 나는 그의 경계에서 풀려났다.

선수들 샤워실 거울에 그려진 하트, 라커룸을 청소하던 청소부들이 립스틱으로 그려넣은 응원문구가 생각난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했었다. 스페인과의 짜릿한 승부차기 끝에 4강에 진출한 날의 감격을 내가 잊을까.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을 추던 사람들, 독일에 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월드컵 4강! 우리도 놀라고 세계도 놀랐다. 지금 세계를 사로잡는 한류 문화의 열풍도 2002년 월드컵 4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게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던 사람들도 한국의 응원 문화가 흥미롭고, 한국 축구 대표팀은 투지가 넘치고 깊이가 있다고, 한국인은 역동적인 사람들임을 온 세계가 알게 되었다.

6월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한국 대 이집트 경기에서 4-1로 승리한 대한민국 선수들이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일제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겪고 사십여 년간 지속된 군사독재를 자신들의 손으로 끝장낸 한국인들의 허파는 ‘아시아의 자존심’으로 부풀어, 지금 다시 월드컵 16강을 꿈꾸고 있다. 6월14일 대한민국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이집트를 상대해 4대1로 승리했지만, 수비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고 ‘백패스’ 남발 등 경기 내용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주력 선수들이 빠지고 경기 이틀 전에야 한국에 도착해 피곤한 이집트 선수들을 상대로 4골을 넣었다고 승리에 도취하면 안 된다. 이집트와의 경기에서 패했다면 대표팀 감독을 교체하라는 목소리가 커졌으리라.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우리는 5골이나 내주었다.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2골 이상의 실점은 실력 차이라기보다 수비 조직과 정신력이 무너진 결과다. 우리가 이집트와 경기한 날, 네이션스 리그(UEFA Nations League)에서 영국이 헝가리에 0대4로 패했다. 홈에서 백 년 만의 참패라고 언론에서 난리가 났고 영국팀의 주장 해리 케인은 이렇게 말했다 “잊고 싶은 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얻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b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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