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침공’ 6개월 모스크바에 ‘전쟁’은 없었다 [임명묵의 MZ학 개론]
  • 임명묵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8.28 10:00
  • 호수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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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작가 러시아 8개 도시 여행담]
전쟁 하더라도 일상 침해받는 건 싫다는 러시아 청년들,
미국 게임·일본 애니메이션 즐기고 한국의 블랙핑크 춤 따라 해

지난 7월, 필자가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대부분 이랬다. “거기 전쟁 중 아니에요? 갈 수 있어요?”

사실 절차상으로 문제는 전혀 없다. 러시아는 한국과 맺은 무비자 협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직항편이 끊기긴 했으나 제3국을 경유해 입국하면 그만이다. 물론 실제 입국하기 전까지 긴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들어가는 건 문제가 없어도 내부 분위기가 험악하면 여행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모스크바 도모데도보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전쟁을 독려하는 포스터가 잔뜩 붙어있고 경찰이 험악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러시아의 거리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러나 실제 모스크바의 광경은 전혀 달랐다. 전쟁의 느낌은 찾아보려고 노력해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공원에서는 가족들끼리 나와 놀고 있었고, 밤의 번화가에선 남녀가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모스크바 이외에도 러시아 8개 도시를 더 방문했지만 이 도시들도 다를 것은 전혀 없었다.

8월21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고층건물군 주변에서 일단의 청소년들이 K팝 댄스를 연습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6개월을 맞고 있지만 모스크바 거리에선 전쟁 조짐은 엿보이지 않았다.ⓒAP 연합

전쟁 분위기 전혀 느낄 수 없는 러시아 거리

물론 후방에서 지속되는 일상생활 또한 푸틴 정권이 고도로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다. 러시아가 서방의 대규모 제재를 버텨내 경제적 상황을 안정화시킨 것은 이제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중요한 것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가능한 한 적은 인력을 동원해 사회의 피로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후방에서 전쟁의 성과를 널리 홍보해 지지를 끌어내는 것보다, 아예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는 게 러시아 정부가 진짜 목표하는 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전쟁’이 아니라 ‘특별군사작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러시아가 이상할 정도로 전쟁 분위기를 내지 않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들이 전쟁의 피로도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수뇌부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이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만나 대화한 대다수 러시아인은 푸틴이 내건 전쟁 명분의 상당수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쟁 자체를 지지하진 않더라도 명분이 아예 없는 일방적 침략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머리로 그것을 인지하는 것과 전쟁의 여파로 일상생활의 어긋남을 감내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이러한 괴리는 특히 러시아 청년층에서 더 심하게 나타난다. 러시아에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 이후 태어난 청년층을 일컫는 ‘P세대’라는 말이 있다. 빅토르 펠레빈이 1999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에서 이름을 딴 용어다. 여기서 P는 다양한 용어를 담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두 단어는 러시아 애국주의의 상징인 푸틴(Putin)과 서구 소비문화의 상징인 펩시(Pepsi)다.

푸틴이라는 단어에는 1990년대 소련 몰락 이후 러시아가 겪었던 극심한 혼란과 자존감의 추락, 2000년대 푸틴 정권 출범과 함께 이뤄진 신속한 안정화와 ‘강한 러시아의 회복’을 그대로 지켜본 청년 세대의 경험이 담겨 있다. 그들에게 22년간 지속돼온 푸틴 체제 바깥의 삶은 미지의 혼란일 수밖에 없다.

 

국가적 동원 체제와 내핍 경제 감수 안 해

반면 펩시라는 단어에는 그렇게 안정화를 이룬 러시아에서 성장한 청년 세대의 문화가 담겨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중년층과 노년층에게 푸틴은 소련을 향한 향수를 다시 채워주는 지도자다. 나치 독일을 무찌르고 미국과 세계를 반분했던 초강대국 프로젝트에 다 같이 참여했던 기억이고, 국가가 삶의 방식을 정해 주고 모든 필수품을 보장해 주던 안정적 삶에 대한 기억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청년층에게 소비에트의 기억은 전혀 없다. 그들에게 소련이란 곧 기성세대들의 ‘나 때는 말이야’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모스크바에서 한 러시아 청년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필자가 지금 소련 시대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하자 “이제 소비에트는 잊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관심사를 늘어놓았다. 코딩에 능숙한 그는 미국 게임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긴다. 자신의 여자친구가 블랙핑크의 춤을 따라 추는 영상도 보여주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세계의 보편문화로 등극한 서구식 소비문화의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P세대에게 푸틴이 가져다준 안정은 펩시로 상징되는 소비문화를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안정이다. 이런 청년층들은 푸틴이 아무리 숭고한 대의를 이야기해도 국가적 동원 체제와 내핍 경제를 감내할 리가 없다. 전쟁이 그들의 일상을 본격적으로 침해한다면 그들로서는 푸틴을 지지할 이유를 잃는 셈이다.

이는 러시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사학자 아자 가트는 현대의 풍요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점차 전쟁을 감수하기를 꺼려 하기 시작하면서 전쟁 수행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반 농촌과 대공황 속에서 성장한 미국인들은 프랑스 평원과 태평양의 섬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한국까지 와서 피를 흘렸다. 하지만 풍요의 시대에 성장한 새로운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을 견뎌내지 못했다. 자국도 아니고 남의 땅을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점점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서유럽에서는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폭등한 에너지 가격으로 인해 유권자들이 대대적으로 동요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키는 것보다 당장 자신들이 누리는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게 더 급선무 아니겠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푸틴이 노린 지점도 정확히 이것이었다. 어차피 서방과 러시아 모두 전쟁을 감내하기 어려워한다면, 우리 편에는 최대한 전쟁의 부담을 덜 지우고, 저쪽이 감당할 전쟁 부담을 늘리면 승리는 러시아의 편이라는 계산이었다. 그 계산은 어쨌든 상당히 정확했던 것으로 드러나는 듯하다.

우크라이나는 ‘국가의 정치적 도구’로서 전쟁이 다시 돌아왔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쟁이 귀환했다고 해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귀환하지는 않은 것 같다. 우크라이나가 보여주었듯, 자국을 방위하고자 하는 전쟁은 분명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모을 수 있다. 하지만 타국을 같이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라면? 피를 흘리기는커녕 당장의 물가 상승을 참아내는 것도 어려워지고 있다.

임명묵 작가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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