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달라진 이강인, 드디어 재능 꽃피우나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8.27 16:00
  • 호수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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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팀의 에이스로 등극…2경기 연속 선발, 사실상 풀타임 맹활약
아기레 마요르카 감독, “필요한 선수” 절대적 신임 속 기술·지능 이끌어내

2001년생 이강인은 올해 프로 4년 차를 맞았다. 2018~19 시즌 중 스페인에서 1군 데뷔를 한 그는 세계적인 특급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2019년 6월 폴란드에서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대회 MVP인 골든볼까지 차지하며 전 세계에 자신의 재능을 알렸다. 하지만 프로 데뷔 후 이강인이 확고한 신뢰 속에 주전으로 뛴 시기는 거의 없다.

지난해 여름에는 유소년 시절부터 10년간 몸담았던 발렌시아를 떠나 마요르카로 이적하며 축구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환경을 바꿔서라도 만년 유망주라는 껍질을 깨겠다는 각오였지만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0경기에 나섰지만 선발 출전은 15번에 불과했다. 총 출전시간은 1411분으로 경기당 평균 47분을 조금 넘었다. 발렌시아 시절과 비슷했다.

ⓒEPA 연합

“이강인의 능력, 본격적으로 증명될 가능성 보았다”

지난 시즌 강등 위기를 맞았던 마요르카는 3월말 멕시코 출신의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을 선임했다. 아기레 감독 체제에서 치른 9경기 동안 5승1무3패를 기록한 마요르카는 16위로 강등을 간신히 면했지만, 이강인은 다시 어려움을 맞는 듯했다. 9경기 중 7경기에 나섰고, 평균 26분 출전에 그쳤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또 한 번 이적을 고려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위기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강인은 잔류와 정면돌파를 택했다. 한국에서 짧은 휴가를 보낸 뒤 스페인으로 돌아가 개인훈련을 시작했다. 프리시즌 동안 치른 친선전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단 강등을 모면하며 한숨 돌린 아기레 감독은 찬찬히 선수단을 관찰하면서 이강인을 주목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강인에 대해 일부 편견이 있는 것 같다. 느리지 않다. 생각과 몸의 스피드 모두 좋다. 내가 요구하는 부분을 잘 수행한다. 올 시즌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8월16일 열린 2022~23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1라운드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경기에 이강인은 선발 출전해 후반 41분까지 뛰었다. 팀은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21일 홈에서 열린 2라운드에서는 레알 베티스에 1대2로 패했지만 풀타임을 소화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다. 오른쪽 측면에 배치됐지만 중앙과 양 측면을 활발히 오가며 기회를 창출했다. 특유의 예리한 전진 패스와 부드러운 탈압박으로 팀 공격을 이끌었다. 결국 후반 11분 정교한 왼발 크로스로 베다트 무리키의 동점 헤더를 도왔고, 이후에는 골대를 강타하는, 득점에 근접한 프리킥까지 선보였다.

패배한 팀의 선수가 찬사를 받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강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축구 전문 통계 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이 8월24일 발표한 유럽 5대 리그(프리미어리그, 프리메라리가, 세리에A, 분데스리가, 리그1)의 주말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렸다. 평점 8.6의 이강인은 킬리안 음바페(파리생제르맹)와 함께 최전방 공격수에 이름을 올렸다. 경기 결과가 아닌 키패스 3회, 드리블 6회, 슛 4회, 어시스트, 골대를 맞힌 프리킥 등 공격 지표의 내용을 주목했다.

이강인은 또 다른 축구 전문 통계 사이트 ‘소파스코어’가 뽑은 프리메 라리가 2라운드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했다. 언론들도 달라진 이강인을 주목했다. 스페인의 유력지 ‘아스’는 “선수의 발전과 성장은 갑자기 이뤄지는 때가 있다. 이강인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능력이 본격적으로 증명될 가능성을 보았다”고 극찬을 보냈다.

 

벤투호, 카타르월드컵의 히든카드로 삼을 만

이강인은 올 시즌 개막 후 2경기에서 총 176분을 뛰었다. 사실상 2경기 다 풀타임을 소화했다. 지난 시즌 평균 47분을 소화했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진 입지를 느낄 수 있다. 아기레 감독의 신뢰는 분명하다. 베티스전이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아기레 감독은 “이강인은 자유를 주면 응답하는 선수다.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그가 필요하다. 계속 이런 플레이를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강인이 지닌 기술과 축구 지능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끌어내겠다는 뜻이다.

이강인은 전형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스페인 현지에서는 아시아 선수임에도 이강인의 기술과 킥, 드리블이 만들어내는 창조성이 프리메라리가 정상권에 있다고 호평해 왔다. 문제는 그 능력이 전술과 얼마나 결합되느냐였다. 이강인이 성인 무대에 데뷔한 뒤의 발렌시아, 그리고 마요르카는 상대를 압도하기보다는 상대에 맞춘 수세적인 경기 운영 위주였다. 결국 이강인에게도 적극적인 압박과 수비 가담을 요구했다. 창의성을 발휘할 자유보다는 전술적 틀에 맞출 것을 더 원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세 이하 대표팀 시절 정정용 감독은 이강인을 중심으로 팀 전술을 짜며 세계 무대에서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반면 파울루 벤투 감독은 A대표팀에 자리 잡은 자신의 전술에 선수가 따라올 것을 원했다. 스피드가 평균 수준이고, 수비력이 좋지 않은 이강인은 점점 외면을 받았고 지난해 3월 한일전 이후로는 A대표팀에 소집되지 않고 있다.

아기레 감독은 정정용 감독과 흡사하다. 이강인의 공격적인 재능을 최대한 끌어내는 방향으로 전술을 짰다. 포지션에 구애를 주지 않고, 상황에 따른 판단도 이강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다. 앞에서 좋은 움직임을 구사하면 이강인이 정밀한 패스를 보내준다는 것을 인정했다. 과거 일본 A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아기레 감독은 당시에도 창의성을 강조했다. 그는 “짜인 틀에 맞춰 계산하는 컴퓨터처럼 플레이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공격 패턴의 기본적인 틀은 있지만 판단은 선수가 해야 하는 만큼 창의성을 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스피드가 느리다는 이강인의 약점도 편견이라는 의견을 냈다. 아기레 감독은 “이강인은 좋은 신체 밸런스와 속도를 겸비했다. 강렬한 장면이 있다”고 언급했다. 25m 이상의 스프린트를 지속적으로 소화하며 스피드를 내야 하는 측면 수비수가 아닌 만큼 짧은 거리에서 폭발적인 순간 스피드는 충분히 낼 수 있다고 소개한 것이다. 감독의 이런 언급은 스피드라는 약점 때문에 위축됐던 이강인의 자신감을 완전히 살려냈다.

상황 인식 개선이 이강인의 약점을 지웠다는 평가다. 기본적으로 배치되는 측면에서는 간결하고 빠른 템포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중앙으로 이동해 공을 잡았을 때는 특유의 드리블과 침투 패스를 구사한다. 공격형 미드필더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져가되, 측면 포지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판단을 하는 게 사고의 속도를 증가시켰다.

아기레 감독이 이강인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다고 보여주는 현 상황은 A대표팀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작용할 수 있다. 본선에 임박할수록 벤투호의 고민은 아시아 최종예선과 달리 상대적으로 적은 점유· 기회 속에서 득점을 만들 수 있는 템포와 정확도 향상이다. 이강인이 소속팀에서 측면 미드필더로 자연스럽게 변신해 적응을 마친다면 1년5개월 넘게 외면하고 있는 벤투 감독으로서도 카타르월드컵을 위한 히든카드로 삼을 만하다. 오는 9월 국내에서 치르는 두 차례 평가전 전까지 이강인이 지금 같은 활약을 이어간다면 벤투 감독도 마지막 테스트를 위한 호출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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