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재벌 회장님의 일탈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2.08.30 07:30
  • 호수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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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물려줬던 김준기 DB그룹 창업주의 고액 자문료 논란
삼양식품·SK·동국제강 등의 총수 일가 ‘옥중 급여’ 더해지며 뒷말

김준기 DB그룹 창업주는 2016~17년 자신의 별장에서 가사도우미 A씨를 성폭행하고, 비서 B씨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하지만 김 창업주는 신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후 경찰의 귀국 종용에도 2년3개월간 해외에 머물렀다. 인터폴 적색수배 등 수사 당국의 압박이 강해지자 김 창업주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자진 귀국했다. 이때가 2019년 10월이었다. 법원은 김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심과 2심 법원은 김 창업주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창업주의 일탈에 DB그룹의 이미지 역시 적지 않은 생채기를 입어야 했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김 창업주는 그룹 회장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자숙의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김 창업주는 2021년 3월 DB그룹 정보기술(IT) 계열사인 DB아이앤씨와 DB하이텍의 미등기 임원으로 조용히 복귀했다. 경영을 자문하는 역할이었다. DB그룹 측은 “창업자로서 50년간 그룹을 이끌어온 사업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자문과 조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언론에 밝혔다.

ⓒ연합뉴스
가사도우미를 성폭행하고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김준기 전 DB그룹 (옛 동부그룹) 회장이 2019년 10월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법원을 빠져나오고 있다.ⓒ연합뉴스

김준기 창업주 경영 자문료가 14억원?

하지만 시민단체나 재계 일각에서는 경영 복귀를 위한 수순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경제개혁연대는 당시 논평을 통해 “비서 강제추행과 가사도우미 성폭행으로 유죄가 인정된 김 전 회장의 경영 복귀가 회사에 득보다 실이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면서 “경영 관여 목적이 없다고 해도 급여와 임원으로서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편법적인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김 창업주가 올 상반기 DB하이텍으로부터 14억원이 넘는 급여를 수령한 것이다. 이는 곧바로 고액 자문료 논란으로 번졌다. 무엇보다 회사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창업주를 미등기 임원으로 올려 거액의 보수를 지급하는 건 최근 불고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방향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권상집 한성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ESG 관련 다수의 연구는 경영자의 언행일치, 솔선수범이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면서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재벌 총수들의 일탈은 재벌의 부정적 이미지만을 부각시키고, 더 나아가 조직 내부 구성원의 사기 저하와 애사심 약화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김준기 창업주는 경영 고문 역할이라도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부 그룹 총수는 구치소에 수감돼 있으면서도 천문학적인 급여를 수령해 논란을 빚었다. 삼양식품의 전인장 전 회장과 아내인 김정수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이들 부부는 2018년 4월 횡령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계열사가 삼양식품에 납품한 포장박스 등을 페이퍼컴퍼니에 납품한 것처럼 꾸며 50여억원을 빼돌린 혐의였다. 전 전 회장의 경우 여러 곳의 페이퍼컴퍼니로부터 월 3000여만원의 급여를 챙긴 혐의도 받았다. 재판에 넘겨진 전 전 회장과 김 부회장은 2020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해 이들 부부는 160여억원의 퇴직금과 27억여억원의 급여를 수령하면서 소액주주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2015년 5월 비자금 88억원을 조성해 해외 도박자금과 개인 채무를 갚는 데 사용한 혐의(특경가법상 횡령)로 구속됐다. 이듬해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2018년 가석방됐다. 경영 공백은 그의 동생 장세욱 부회장이 메웠다. 그럼에도 장 회장이 수십억원의 옥중 급여를 받아 논란이 일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우 옥중에서 거액의 급여를 수령했다가 논란이 일자 돈을 기부한 사례다. 최 회장은 2013년 1월 계열사의 펀드 출자금 수백억원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법정 구속됐다. 201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그는 2년6개월 동안 복역해야 했다. 이 기간 SK그룹은 전문경영인 집단지도체제인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2013년 301억원의 연봉과 286억원의 배당금을 수령해 논란을 빚었다.

ⓒ시사저널포토·사진공동취재단

총수 일가 일탈 막기 위한 제도 작동 안 해

최 회장이 법정 구속되기 전 (주)SK와 SK이노베이션, SK C&C, SK하이닉스 등의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SK그룹 측은 “최 회장이 수령한 급여 중 상당수인 207억원은 경영활동에 따른 성과급이다. 나머지 94억원이 4개 계열사로부터 월급 형식으로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최 회장이 당시 경영에 참여할 수 없던 상황이었던 만큼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여론에 밀린 최 회장은 그해 수령한 연봉을 모두 반납했다.

이는 회삿돈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지난해 검찰에 구속된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의 행보와 대비된다. 이전까지 최 전 회장은 급여로 40억원, 상여금으로 12억5000만원 정도를 받았다. 하지만 2021년에는 전년도 경영 성과급(16억1000만원)과 기본급(6억6700만원)만을 수령했다. 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검찰 기소 이후 경영에 전념할 수 없는 여건 등을 고려한 결과다”면서 “(최 전 회장은) 3월 이후 보수를 받지 않고 근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경영 전문가들은 재벌 총수들의 이 같은 일탈을 현재의 제도로는 막을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총수 일가가 일감 몰아주기를 할 여력이 없어지면 마지막으로 빼먹는 게 급여와 퇴직금이다. 회사 사정이야 어떻든 과도하게 급여·퇴직금을 받아 또 다른 방식으로 사익을 편취한다”면서 “하지만 총수 일가의 지나친 급여·퇴직금 수령을 법적으로 막을 방법이 아직까지 없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사외이사제도, 이사회 의결권 범위 확대, 주주대표소송 등 총수 일가의 일탈을 막기 위한 다양한 대안이 거론됐다. 하지만 기업 거버넌스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총수 일가의 전횡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재벌 총수들의 사익 추구를 막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MoM(Majority of Minority·소수주주동의) 제도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MoM은 대주주와 회사 간 이해충돌이 발생하면 대주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주들의 투표로 의사를 결정하는 제도다”면서 “이런 식으로 임원 연봉 산정에 투명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려고 노력해야 총수 연봉을 둘러싼 논쟁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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