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스포츠와 독서
  •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2.09.16 17:05
  • 호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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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오늘 무슨 책을 읽었을까? US오픈 여자단식 결승전을 앞두고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폴란드의 테니스 선수 이가 시비옹테크(Iga Swiatek)를 보며 나는 궁금했다. 책 읽기를 좋아해 경기 전에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그녀가 첫 US오픈 결승전을 앞두고 무슨 책을 읽었을까? ‘여자 나달’처럼 힘이 넘치는 21세의 시비옹테크. 힘은 좀 떨어지지만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는 튀니지의 온스 자베르(Ons Jabeur).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인데 누구를 응원할까?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몸을 푸는 그녀들을 보며 내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가 분명해졌다.

라켓을 들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자베르를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올해 윔블던에서도 결승에 올랐으나 아깝게 우승을 놓친 자베르가 이번에는 타이틀을 가져가기를 나는 바랐다. 자베르가 이긴다면 아프리카 국적의 여성 최초로, 아랍권 국가 남녀 통틀어 최초의 그랜드 슬램 테니스 단식 우승이라는 역사를 쓰게 된다. 튀니지에서 ‘행복 장관’으로 불리는 자베르는 아랍 여성들의 희망이며 아프리카 소녀들의 좋은 본보기다. 자베르가 우승한다면 아랍과 아프리카의 자존심이 올라가고 ‘나도 그녀처럼 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미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나리라. 총 대신 테니스 라켓을 든 젊은이들이 늘어나기를 나는 희망한다.

ⓒEPA 연합
ⓒEPA 연합

한 경기를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나, 내기를 한다면 내가 이기리라. 작년에 윔블던 경기 도중, 코트 뒤에 (음식물을) 토하는 모습을 본 뒤 나는 자베르에게 반했다. 경기에 열중해 (카메라가 자신을 잡는지도 모르고?) 관중들에게 잊지 못할 ‘매치 포인트’를 보여준 그녀. 경기 중에 토할 정도로 컨디션을 조절하지 못하다니. 가난한 나라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녀에게 맞춘 식단을 짜줄 전담 요리사도 없겠지. 물리치료사는 있겠지만, 시비옹테크처럼 심리치료사가 있어 매일 그녀의 심리 상태를 확인하지는 못하리라. 프랑스 오픈 경기 내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있던 시비옹테크에게 그녀의 심리치료사는 경기를 앞두고 마지막 장을 읽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소설의 마지막이 슬퍼서,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를 떠나는 장면을 읽다가 그녀가 울까봐, 울다가 코트에 나오면 경기력이 떨어질까봐 그녀의 심리치료사는 ‘너 어디까지 읽었니?’라고 물으며 시비옹테크의 독서 진도를 확인했다.

자베르의 코치가 백인이 아니라 튀니지인이라는 것도 내 시선을 끌었다. 최고 수준의 아시아·아프리카 선수들은 보통 자국 출신이 아니라 외국인 코치를 둔다. 히딩크가 없었다면 한국의 월드컵 4강이 가능했을까? 브라이언 오서 코치가 없었다면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까. 세계 테니스의 변방인 튀니지의 온스 자베르가, 여성들 머리에 수건을 두르게 하는 아랍 국가의 여성이 신체의 상당 부분이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튀니지인 감독 밑에서 훈련해 그랜드 슬램 결승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3세트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이 될 줄 알았는데, 경기는 시비옹테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뉴욕의 테니스 경기장 바닥에 (9·11 테러를 기념하는) ‘9/11/01’이 선명하게 새겨진 9월11일, 코트의 주인공이 아랍권의 자베르였다면 뉴욕 시민들의 반응이 엇갈렸을지도 모르겠다. 경기가 끝난 뒤 US오픈 여자단식 챔피언 시비옹테크에게 우승상금 260만 달러 수표를 전달하며 사회자가 소감을 물었다. “그게 현금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독서를 많이 한 그녀는 유머 센스도 뛰어나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b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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