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바다’로 다시 떠날 시간이 왔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01 11:05
  • 호수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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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정상 개최되는 부산국제영화제...그 면면 미리 보기

영화의 바다로 떠날 시간이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5일부터 14일까지 열흘간의 항해를 시작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무려 3년 만의 정상 개최다. 71개국 243편, 커뮤니티비프 상영작 111편을 포함해 총 354편의 영화가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객석은 띄어 앉기 없이 100%로 운영되며, 그간 중단됐던 아시아 영화인 교류의 장인 플랫폼부산도 다시 열리는 등 완전한 회복이다. 올해의 슬로건 ‘다시, 마주 보다’는 축제가 잠시 멈추고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간 대신 다시 힘차게 전진을 준비 중인 영화제의 자세를 알린다.

영화 《바람의 향기》 스틸컷ⓒBIFF 제공

영화제를 열고 닫는 작품들

개막작은 이란 감독 하디 모하게흐의 《바람의 향기》다. 이란의 외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전신 마비 아들을 간호하며 살아가는 하반신 장애가 있는 남자의 사연을 그린다. 어느 날 집에 전기가 끊기면서 수리 담당자가 찾아온다. 그는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야만 한다.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정서는 ‘선의’다. 곤궁에 처한 사람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모른 체하는 대신 정성을 다해 도우려는 등장인물들이 작품에 가득 온기를 불어넣는다. 선의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작고 따뜻한 단위의 동력이기도 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바늘귀에 실을 꿰지 못하는 노인을 돕거나, 연인을 만나러 가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꽃다발을 만들어주는 등 인물들의 작은 행동은 잊지 못할 풍경들이 돼 영화를 수놓는다.

올해 개막작은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 아래 시네마의 의미와 가치가 흔들렸던 최근 몇 년의 시간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안성맞춤으로 보이는 선택이다. 인공적인 장치들을 배제한 채 영화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방식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물로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아시아 영화를 폭넓게 발굴하는 역할을 지속해온 부산국제영화제의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 역시 개막작 선정 이유를 수긍하게 한다. 모하게흐 감독은 두 번째 장편영화 《아야즈의 통곡》(2015)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영화 《한 남자》 스틸컷ⓒBIFF 제공

폐막작은 분위기가 180도 다르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2016)으로 전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시카와 게이 감독의 신작 《한 남자》다. 이 영화는 미스터리 장르 안에서 동시대의 풍경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2018년 요미우리문학상을 받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주인공 리에는 이혼 후 아이와 함께 고향에 정착해 살고 있다. 다이스케라는 남자와 조심스레 새로운 인생을 꿈꿀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어느 날 다이스케가 사고로 죽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장례식에 찾아온 다이스케의 형은 죽은 사람이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한다. 다이스케는 과연 누구인가. 리에는 자신의 이혼 과정을 도왔던 변호사 기도를 고용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보기 시작한다.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은 누구인가. 리에의 혼란과 의문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극이 진행될수록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향해 폭넓게 나아간다. 기도가 재일교포 3세 변호사라는 설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경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존재는 영화 전체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정치적 문제로 확장시킨다. 일본의 스타 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기대를 모은다. 사건의 진실을 쫓는 변호사 기도는 쓰마부키 사토시, 혼란에 빠진 리에는 안도 사쿠라가 연기한다. 영화제 기간 동안 이시카와 게이 감독, 쓰마부키 사토시를 비롯해 다이스케를 연기한 구보타 마사타카까지 나란히 내한해 팬들과 직접 만날 예정이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 양조위ⓒGQkorea·(주)디스테이션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영화 《2046》 스틸컷ⓒ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영화제를 수놓는 스타들

영화제가 대면 행사를 다시 재개하면서 부산을 직접 찾는 스타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우선 양조위의 내한 소식이 일찌감치 전해지며 팬들의 기대감에 불이 지펴진 상황. 양조위는 2004년 개막작 《2046》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지 18년 만에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로 돌아오게 됐다. 매해 아시아 영화산업과 문화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며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아시아 영화인 혹은 단체에 수여하는 상이다. 영화제 기간에는 양조위가 직접 고른 그의 대표작 《해피투게더》(1998)와 《화양연화》(2000) 등 6편이 상영된다.

지난해 아시아 최초로 드라마 시리즈를 껴안았던 부산국제영화제의 신설 섹션 ‘온 스크린’이 올해 그 규모를 대폭 키우면서 총 9편의 드라마가 부산에서 첫선을 보이게 됐다. 라스 폰 트리에의 《킹덤 엑소더스》와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커넥트》를 비롯해 각 OTT 플랫폼의 대표주자들을 모두 포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 스크린 섹션ⓒ젠트로파 엔터테인먼트·디즈니+·넷플릭스·TVING 제공
온 스크린 섹션 영화 《킹덤 엑소더스》 포스터, 디즈니+ 드라마 《커넥트》 스틸컷,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 포스터, 티빙 드라마 《욘더》 포스터ⓒ젠트로파 엔터테인먼트·디즈니+·넷플릭스·TVING 제공

노덕 감독이 연출하고 전여빈과 나나가 주연을 맡은 SF 추적극 《글리치》(넷플릭스), 이준익 감독의 첫 드라마 시리즈이자 SF 로맨스인 《욘더》(티빙), 한석규와 김서형이 주연을 맡은 요리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왓챠),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성장 드라마 《약한영웅 Class 1》(웨이브) 등이 시리즈의 일부 회차들을 공개한다. 온 스크린 섹션의 확대는 급변하는 영화산업의 흐름이 뚜렷하게 감지되는 지점이다. 각 작품의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부산을 찾으면서 레드 카펫이 한층 화려해지는 효과 역시 톡톡하다.

양조위 못지않게 화제를 모은 해외 게스트 중에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도 있다. 화상 연결이긴 하지만, 올 연말 개봉하는 《아바타》 시리즈의 2편 《아바타: 물의 길》의 스페셜 영상을 그가 직접 소개하는 자리다. 프로듀서 존 랜도는 부산에 와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호수의 이방인》(2016) 등으로 유명한 세계적 거장 알랭 기로디는 마스터 클래스 ‘알랭 기로디: 창의적이고 희귀한 시네아스트의 낯선 세계’의 주인공이자, 갈라 섹션 초청작 《노바디즈 히어로》의 감독 자격으로 영화제에 참석한다. 관객과 배우가 직접 만나 그들의 연기 인생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액터스 하우스’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이영애, 한지민, 강동원, 하정우가 참여한다.

지석 섹션 영화 《디셈버》 스틸컷, 영화 《라이프&라이프》 포스터, 영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스틸컷ⓒBIFF 제공
지석 섹션 영화 《디셈버》 스틸컷, 영화 《라이프&라이프》 포스터, 영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스틸컷ⓒBIFF 제공

일본 영화의 새 지형 가늠할 특별 기획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야심 차게 선보이는 신설 섹션 중에서는 ‘지석’이 눈에 띈다. 아시아 영화감독의 신작과 화제를 소개하는 ‘아시아 영화의 창’ 섹션 중 10편을 따로 선정해 ‘지석상’을 수여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부터 별도의 섹션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미래를 이끌어갈 것으로 기대되는 신인 감독의 장편을 소개하는 섹션인 ‘뉴 커런츠’와 더불어 영화제를 대표하는 경쟁부문으로 자리매김해갈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영화의 성장과 지원에 헌신했던 고(故)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더욱 적극적으로 기리겠다는 영화제 측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석 섹션을 통해서는 개막작 《바람의 향기》를 포함해 총 8편의 작품이 소개된다.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수업을 하던 이란의 한 교사가 학생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집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라이프&라이프》, 법정에서 7년 전 딸을 죽인 살인자와 대면하는 부모를 주인공으로 용서와 구원을 향한 서사로 나아가는 일본 작품 《디셈버》,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난 두 친구의 여정을 그린 이광국 감독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등이 상영을 기다린다.

아이콘 섹션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영화 《브로커》 포스터, 영화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영화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포스터ⓒCJ ENM·카날+(주)·Estudios Churubusco Azteca S.A. 제공
아이콘 섹션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영화 《브로커》 포스터, 영화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영화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포스터ⓒCJ ENM·카날+(주)·Estudios Churubusco Azteca S.A. 제공

‘아이콘’ 섹션에는 해외 영화제를 뜨겁게 달궜던 거장 감독들의 신작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 칸영화제를 사로잡았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인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도 포함된다. 제임스 그레이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반영해 만든 아름다운 성장담인 《아마겟돈 타임》, 루카 구아다니노와 티모시 샬라메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에 이어 다시 한 번 손을 잡은 영화로 기대를 모으는 《본즈 앤 올》, 《버드맨》(2015)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 등으로 팬층이 두터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기대작이다.

특별 기획 섹션에서는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주목할 만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이후 주목할 만한 동시대 일본 감독은 누구인지를 감지할 수 있는 기회다. 2010년 이후 데뷔한 일본 감독들의 작품들을 기준으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물론이고 일본의 도쿄영화제, 오사카 아시안 영화제 등의 프로그래머들이 보내온 추천 리스트 가운데 10편이 선정됐다.

영화제 기간 중 부산은 ‘동네방네가 축제’

커뮤니티 비프는 2018년 출범한 영화제의 스핀오프 행사다. 관객이 프로그래머가 돼 작품을 선정하는 ‘리퀘스트 시네마: 신청하는 영화관’, 감독과 배우를 초청해 영화를 보며 채팅을 나누는 ‘마스터 톡’, 변화하는 영상 문화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는 ‘커비 컬렉션’ 등 6개 섹션으로 나뉜다. 올해의 게스트 초청 규모만 150여 명. 부산 전역 16개 구·군을 상영관으로 활용하는 ‘동네방네 비프’ 역시 눈길을 끄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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