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꽁꽁 ‘에너지 한파’ 덮친 유럽에 가스관 누출 사고까지
  • 김휘동 유럽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08 14:05
  • 호수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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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러시아, 러시아는 미국을 누출 사고 배후로 의심
추운 겨울 앞두고 유럽 에너지 안보 위기감 확산

9월26일(현지시간)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천연가스 송출관인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에서 누출 사고가 일어나면서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에너지 안보 위기감이 확산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러시아에선 각각 상대를 향해 ‘사보타주’(파괴 공작 행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송출이 중단된 가스관이었기에 더 큰 물리적 피해로 번지진 않았지만, 다가오는 겨울철을 앞두고 연일 치솟는 에너지 비용과 물가 상승으로 인해 이미 걱정에 사로잡힌 유럽인들의 불안한 심리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특히 이번이 가스를 걸어 잠근 러시아와 강력한 대러 제재로 견제하는 EU 간 ‘강대강’ 대치에서 맞는 첫 겨울이니만큼, 올겨울 유럽이 진정한 엄동설한을 체감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9월28일(현지시간) 발트해의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가스 누출 장면이 스웨덴 해안경비대에 포착됐다. 왼쪽 사진 은 독일 루브민의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착륙 시설에 있는 파이프들이다.ⓒREUTERS

노르트스트림 사업2, 유럽 안보에 위협 될 것

EU와 러시아는 이번 누출 사고가 ‘고의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는 서로 동의하는 모양새다. 다만 그들이 의심하는 주체는 서로 다르다. EU는 9월28일 회원국 공동성명을 통해 이번 누출 사태에 배후가 있음을 시사했으나, 특정 국가를 지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럽 내에선 러시아가 가스관 누출 사고를 일으켰을 거란 분위기가 팽배하다.

러시아 역시 가스관 누출 사고를 “국가가 지원한 테러리즘”으로 규정하며 유럽의 의심을 맞받아치는 모습이다. 러시아는 9월30일 크렘린궁 대변인 발표를 통해 “이러한 테러 행위가 한 국가의 관여 없이 일어났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러시아는 미국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러시아 외교부는 “이번 누출 사고로 인해 오로지 미국만이 자국의 유럽행 천연가스 수출을 늘릴 수 있는 이득을 누린다”고 주장했다.

미국 백악관은 러시아의 주장에 대해선 전면 부인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반기는 분위기를 나타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9월30일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날 엄청난 기회”라고 언급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그의 제국주의적 계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에너지의 무기화’를 빼앗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해 왔던 미국으로선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해석이 나온다.

공작 가능성이 짙어지면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이번 누출 사고에 대해 국제조사단이 독일을 중심으로 설치될 예정이다.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이 자국의 배타적경제수역을 지나는 덴마크와 스웨덴이 참여한다. 또한 이번 사고로 불거진 에너지 안보에 대한 위기감으로 인해 현재 유럽 각국은 자국의 에너지 인프라 공격에 대한 대비 태세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가스 수출 감축으로 인해 유럽 천연가스 최대 수출국으로 등극한 노르웨이의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중요성이 상당히 높아졌고, 영국·독일·프랑스는 노르웨이의 에너지 인프라 안보를 위해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 해군은 북아프리카부터 유럽까지 시실리안해협을 관통하는 가스관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강화하기로 했다.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에 대한 불안감은 러-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유럽 내에서 커져 왔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더욱 중대한 이슈로 떠오른 모습이다. 사실 EU의 높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에 대해 공급망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유럽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가격 경쟁력으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다. 특히 이를 적극 옹호한 것은 독일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의 반(反)원전·석탄 친환경 에너지 믹스 정책 추진은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중요성을 더욱 높여 놨다. 이번 에너지 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은 올해 모든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중단할 계획을 세웠고, 이로 인한 발전 공백을 노르트스트림을 통한 러시아산 천연가스로 채우려 했었다.

노르트스트림을 확장하는 노르트스트림2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 사업을 꾸준히 옹호해온 메르켈 전 총리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례로 2020년 ‘푸틴의 정적’으로 불리는 러시아의 야당 활동가인 알렉세이 니발니가 소련에서 개발한 생화학 무기인 ‘노비촉(Novichok)’에 노출되었을 당시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노르트스트림2 건설 중단 여론이 확산된 바 있다. 그러나 메르켈 전 총리는 니발니에 대한 공격을 비판하면서도 노르트스트림2에 대해선 “지극히 상업적인 사업”이라며 선을 그었다. 또한 그는 노르트스트림2 사업과 관련된 미국의 제재를 해제시키기 위해 부단한 외교적 노력을 펼쳤으며, 당시의 독일 여론 또한 이를 지지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 사업이 유럽에 안보 위협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이들은 독일~러시아 직결 가스관 확장은 단순히 동유럽 가스관의 송출량을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들이 받는 가스관 통행료를 삭감시킴으로써 서유럽이 더 이상 동유럽에 관여하지 않게 돼 유럽의 분열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미국 또한 이러한 의견에 동참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부터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노르트스트림 사업으로 인한 러시아 가스 의존도 상승이 유럽의 안보에 위협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노르트스트림2가 완공된 2021년, 때마침 퇴임하는 메르켈 총리를 향해 도날드 터스크 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노르트스트림2는 메르켈 총리의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울림 있는 경고를 남기기도 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에 대한 고민 커져

이후 러시아의 본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자 유럽에서는 노르트스트림2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 왔다. 특히 이 사업은 2014년 러시아의 일방적인 크림반도 합병 이후 약 1년 뒤 독일 등 관련국 정부로부터 ‘청신호’를 받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기에, 이는 푸틴 대통령에게 단순히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침공과 같은 행위를 오히려 부추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일각의 주장도 존재한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기간 동안 의지해온 러시아산 가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탓인지 EU는 현재까지도 러시아산 원유와 석탄에만 금수 조치를 도입했을 뿐 천연가스에 대해선 구체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다.

우려 속에 완공되었던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독일 정부의 가동 허가가 무기한 연기되며 결국 작동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9월26일 발생한 누출 사고로 인해 러시아는 더 이상 노르트스트림을 통해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다. 또한 이미 송출이 중단된 노르트스트림으로 인해 에너지원 다변화와 원자력발전소 2기의 존치를 결정한 독일에도 사고 자체가 당장 큰 부담을 가져오진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관측된다. 유럽 내에선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고민과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습이다. 최근 불가리아에서 그리스를 잇는 새 가스관 ‘IGB’가 새롭게 개통되며 본격 가동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장 시급한 것은 에너지 가격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현재 유럽 내 에너지 가격은 치솟을 대로 치솟은 상황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없는 상태에서 겨울을 앞둔 유럽인들이 느끼는 에너지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한 상태다. EU는 에너지 기업 대상 초과이윤세인 ‘횡재세’와 가계 에너지 보조금 및 에너지 상한제 도입 등을 예고했으나, 이미 높아져 버린 에너지 가격을 낮추기보다는 올겨울 있을 추가적인 상승을 제한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욱이 치솟는 유럽 내 에너지 비용이 고인플레이션 고착화로 이어지며 유럽 밥상 물가의 상승과 함께 높은 난방비로 인한 식료품 생산 차질까지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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