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셋 청년에 ‘죽음의 현장’ 된 일터…불매운동 확산
  •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com)
  • 승인 2022.10.1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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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피 묻은 제품 살 수 없다” 보이콧 움직임
정치권도 질타…야권, 정부 중대재해법 개정 제동
10월17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SPC 계열 SPL 제빵공장에서 지난 15일 소스 교반기계에 끼여 숨진 20대 근로자 A씨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10월17일 경기도 평택시 SPC 계열 SPL 제빵공장에서 지난 15일  소스 배합기계에 끼어 숨진 20대 근로자의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일터로 나간 또 한 명의 청년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제빵 공장에서 일하던 23살 여성 노동자에게 일터는 죽음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이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반복되면서 기업의 안전관리 실태와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움직임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소비자들의 불매운동도 갈수록 확산하는 모양새다. 

18일 트위터 등 온라인에서는 파리바게뜨 등 SPC그룹이 운영하는 브랜드를 공유하며 불매운동을 독려하는 글이 확산하고 있다. '#SPC 불매, #살아서 집으로 가고 싶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 등 해시태그를 단 글이 속속 올라온다. 

소비자들은 "노동자의 피가 묻은 빵을 어떻게 사먹겠나", "이토록 슬픈 장면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동료 직원이 사망한 곳 바로 옆에서 다음 날부터 빵을 만들어야 했던 분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다"는 등 사측의 안전조치 미흡과 후속 대응을 질타하는 반응이 이어진다. 

불매 운동에 동참했다는 한 소비자는 "국내 제빵업계 1위인 SPC 그룹 브랜드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파리바게뜨에 가자는 지인에게 도저히 편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거절했다"며 청년 노동자 사망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지난 15일 새벽 SPC 계열사 SPL의 평택 공장에서는 23세 여성 노동자 A씨가 배합기계에 몸이 끼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A씨는 1.5m 높이의 배합기에서 샌드위치 소스를 만드는 작업을 하던 중 상반신이 기계에 끼이면서 참변을 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어머니와 고등학생 남동생을 부양해오던 스물 셋 청년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20대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경기도 평택시 SPC 계열 SPL 제빵공장 내부. 10월17일 사고가 난 기계 주변으로 흰 가림막이 덮여 있고, 바로 옆 공간에서는 공장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 화섬식품노조 SPL 지회 트위터 캡처
20대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경기도 평택시 SPC 계열 SPL 제빵공장 내부. 10월17일 사고가 난 기계 주변으로 흰 가림막이 덮여 있고, 바로 옆 공간에서는 공장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 화섬식품노조 SPL 지회 트위터 캡처

현장에 별도의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아 경찰과 고용노동부 등은 직원들과 사측을 상대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파악하고 있다. A씨 동료들은 사측이 반복된 사고에도 사전 안전조치를 미흡히 했고, 사고 예방 원칙을 따르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 노조 측은 "A씨가 20kg에 달하는 원료를 배합기에 붓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었거나, 잘 섞이지 않는 원료들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배합기 주변에 안전펜스가 설치됐거나 자동멈춤장치(인터록)가 있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안전설비 장치인 인터록이 설치된 기계는 덮개를 열면 자동으로 운전이 멈춘다. 해당 공장에는 A씨가 사고를 당한 것과 유사한 기계 9대 중 7대에 이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SPL 측은 사고 발생 후 '모든 기계에 안전장치가 설치돼 있다'고 설명했지만, 정의당 의원들의 현장 방문에서 사고 이후 추가로 센서를 설치한 사실이 드러났다. 

'2인1조' 작업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A씨가 기계에 몸이 끼이는 동안 함께 있어야 했던 동료는 다른 업무 때문에 현장에 없었다. 사측은 '2인1조'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고 했지만, 직원들의 얘기는 다르다. 동료들은 "소스 배합을 위한 재료를 계속 날라야 하기 때문에 2인1조 근무가 지켜질 수 없는 구조"라고 반박했다. 노조는 특히 사고 당일에는 A씨와 함께 일하던 근무자가 결원이 난 절단 작업 공정에 투입되면서 A씨 혼자 일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강규혁 화섬식품노조 SPL 지회장은 "불과 열흘 전에도 해당 공장에서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다"며 "우리는 안전교육도 받지 못한 채 한 달 치 교육 이수 서명을 허위로 하면서 안전하지 못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안전 불감증에 빠진 회사에서 '저 사고가 나한테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일하는 건 너무나 잔인하다"고 울분을 토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나란히 이번 사망사고와 관련한 비판 성명을 내고,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노동부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고가 안이한 인식에서 출발한 '인재(人災)'였다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움직임에 대한 질타도 쏟아진다. 야당과 노동계는 앞서 기획재정부가 노동부에 전달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에 경영계가 요구해 온 '사업주 책임 완화 요건'이 담겼다며, 사실상 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로 판단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있는 법조차 지키지 않으려고 '시행령 통치' 꼼수 부리다 그렇게 늘어난 틈새 사이사이로 노동자들이 끼어 죽고, 떨어져 죽고, 깔려 죽는다"고 일갈했다. 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시도에 맞선 대정부 투쟁 수위를 높이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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