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에 쫓겨난 중국 개혁의 상징 ‘공청단’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27 17:05
  • 호수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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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사라진 ‘개혁·개방’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의 유산
한 권력 파벌의 단순 몰락 아닌 중국 정치의 변곡점

10월22일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폐막식이 진행되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후진타오 전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강제로 끌려 나간 것이다. 국영 CCTV의 송출 화면과 중화권 언론의 보도를 통해 재구성한 상황은 이렇다. 오전 11시15분쯤 후진타오는 탁자에 놓인 서류를 열어 보곤 깜짝 놀랐다. 왼쪽에 앉은 리잔수 전국인민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후진타오의 서류를 가져가려 하면서 옥신각신했다. 이에 오른쪽에 앉은 시진핑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밖에 있던 중앙판공청(비서실)의 책임자를 불렀다.

그러자 책임자와 젊은 남성이 연단에 들어와 앉아있던 후진타오를 일으켜 세워 끌고 나갔다. 후진타오는 잠시 저항했으나 당해낼 수 없었다. 끌려 나가는 와중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뭐라 말을 건넸고, 리커창 총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진핑은 머리만 살짝 돌려 끄덕일 뿐이었다. 후진타오가 본 서류는 새로 선출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이었다. 후진타오는 명단에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계열의 인물이 한 명도 없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후진타오와 리커창은 중국공산당 3대 파벌 중 하나인 공청단파 출신이다.

10월2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폐막식 도중 후진타오 전 주석이 갑자기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10월2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폐막식 도중 후진타오 전 주석이 갑자기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후진타오 전 주석, 공청단파 다 빠진 명단 보고 충격

20차 당대회 결과, 공청단파인 리커창 총리와 왕양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은 상무위원에서 탈락해 퇴임했다. 리커창과 왕양은 67세 동갑내기다. 덩샤오핑이 세운 관례인 ‘칠상팔하(67세는 남고 68세 이상은 퇴임하는 것)’에 의거하면 최고지도부에 남을 수 있는 나이다. 더욱 충격적인 일을 당한 이는 후춘화 부총리였다. 후춘화는 1980년대 티베트에서 후진타오와 함께 일했고, 공청단파에서 가장 전도유망했던 인물이다. 2012년 49세에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줄곧 미래의 총서기 혹은 총리로 손꼽혀 왔다.

그러나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이 되지 못했고, 이번 당대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위원마저 탈락했다. 중화권 언론은 후진타오가 끌려 나가면서 저항했던 이유가 이렇듯 최고 권부에서 공청단파 인물들이 모두 축출되고 몰락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후진타오는 개혁·개방 이후 후야오방 전 총서기에 뒤이어 공청단파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장본인이었다. 리커창과 왕양은 후진타오 집권 시기에 상무위원이 되었고,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과 함께 최고지도부를 형성해 중국을 통치해 왔다.

그렇다면 공청단파는 어떻게 중국 권부의 주요 파벌이 되었을까? 그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공청단의 체계와 발전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공청단은 1920년 중국공산당이 상하이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교육과 예비 당원 양성을 위해 설립한 사회주의청년단을 기원으로 한다. 1922년 이를 전국 규모로 확대했고 1925년 공청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공청단의 입단 대상은 14세 이상 28세 이하 청소년과 젊은이다. 원칙상 가입은 공산당원, 다른 공청단원, 교사 등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학생은 신청하면 누구나 입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14세 이상 중국 청소년과 대학생 대부분이 공청단원에 가입했다. 공청단원은 사회주의 사상학습을 이수하고 다양한 대내외 활동에 참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업과 봉사 성적, 공산당 및 인민에 대한 공헌도 등을 평가받아 공산당에 추천된다. 따라서 공청단은 공산당원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공청단 전국대표대회는 당대회처럼 5년마다 개최된다. 최근 대회는 2018년 베이징에서 열려 1529명의 대표가 참석했던 18차다. 당시 전체 공청단원은 8124만 명, 기층조직은 360여만 개로 파악됐다.

기층조직은 중국 내 모든 중ㆍ고등학교와 대학교, 기업체, 농어촌 등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 기업이 적지 않은데, 공청단의 조직 유지와 활동을 위해 수익사업을 벌인다. 중국국제유한공사, 청년실업발전총공사, 중국청년여행사 등 분야가 다양하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청년정치대학 등 교육기관과 베이징에서 중국청년보·중국청년출판사 등 신문·출판업체를 운영한다. 광화과기기금회·중국청소년발전기금회 등 비영리기금도 설립해 자금을 끌어모은다. 이를 통해 중국 각지의 청소년궁과 청소년협회, 아동협회 등 전위조직도 관리한다.

공청단을 이렇게 성장시킨 이가 후야오방이었다. 후야오방은 1949년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공청단과 첫 인연을 맺었다. 1952년에는 공청단 제1서기가 됐고 그 뒤 무려 19년 동안 재임했다. 비록 문화대혁명 시기 후야오방은 덩샤오핑과 같이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고난을 겪었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죽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 뒤 고속 승진을 거듭해 1980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됐고, 이듬해에는 총서기에 선임됐다. 개혁·개방 이후 첫 공산당 총서기로, 덩샤오핑의 후계자임이 대내외에 천명됐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경기과열·인플레·부정부패 등 개혁·개방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따라서 1986년 학생들은 “민주주의 없이 현대화는 없다”며 시위를 벌였고, 후야오방은 이를 옹호했다. 하지만 보수파가 격렬히 비난하자,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희생양으로 삼아 끌어내렸다. 후야오방의 후임으로는 자오쯔양이 선임됐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은 후야오방이 갑자기 죽으면서 촉발됐다. 덩샤오핑은 톈안먼 사건 직후 자오쯔양마저 축출했다. 하지만 후야오방이 공청단 제1서기로 발탁해 키웠던 후진타오를 미래의 지도자로 점찍었다.

1982년 11월 전인대 회의 석상에서의 덩샤오핑과 후야오방. 현재 이 사진은 중국에서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후야오방추모위원회 제공
1982년 11월 전인대 회의 석상에서의 덩샤오핑과 후야오방. 현재 이 사진은 중국에서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후야오방추모위원회 제공

“후춘화, 총리 안 되면 중국 퇴보할 수도” 우려가 현실로

이런 공청단파의 역사는 중국인 대부분이 안다. 공청단에 입단하면 중국공산당사와 더불어 공청단 역사를 배우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소수만 가입할 수 있지만, 공청단은 학창 시절에 통과의례처럼 거쳐 간다. 따라서 20차 당대회 개최 이전에 적지 않은 중국인이 왕양의 상무위원 잔류와 후춘화의 총리 선임을 기대했다. 자신들이 청소년기와 젊은 시절에 활동했던 공청단에 대한 애정과 함께 공청단파를 ‘개혁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야오방은 중국 개혁파의 상징이었고, 후진타오는 집권 시기 적극적인 대외 개방을 추진했다.

이는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제로 코로나 정책을 이번 당대회에서 높이 평가한 시진핑과 대비된다. 게다가 리커창 총리는 재임 내내 중국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줄지 않는 빈곤층 문제를 지적해 왔다. 그렇기에 한 변호사는 필자에게 “만약 후춘화가 차기 총리로 선임되지 못하면 향후 중국은 퇴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20차 당대회의 결과는 단순히 한 권력 파벌의 몰락으로만 볼 수 없다. 중국 최고 권부에서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의 유산이 완전히 사라지고, 개혁파의 큰 줄기가 잘려 나간 정치적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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