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긴축과 완화 사이 고심 중인 尹 정부 [김상철의 경제 톺아보기]
  • 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06 16:05
  • 호수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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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發’ 자금시장 경색 우려되지만…
유동성 확대, 긴축 통화정책 기조와 어긋나 고민

1985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은행과 IMF 연차총회에 참석한 당시 미국 연준 의장 폴 볼커를 만나 인터뷰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인플레이션과 싸워 이긴 연준 의장으로 누구나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 시점에서 보면 사실 좋은 얘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플레이션을 잡는다고 경기를 지나치게 위축시켰다는 지적이 많았다. 볼커는 기준금리를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높게 유지하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잡았다. 1983년에는 물가상승률이 3.2%로 크게 떨어졌는데도 기준금리를 8% 이상으로 유지했다. 그 결과 심각한 경기 침체가 나타났고 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볼커의 긴축 공세는 멕시코를 디폴트로 몰아넣었고 중남미 채무 위기를 촉발하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레이건 대통령의 백악관이나 재무부와의 충돌도 잦았다. 연준의 긴축 기조와는 달리 당시 레이건 정부 재정정책의 방향은 감세와 지출 확대였다.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돈줄을 조였지만 정부는 반대로 경기를 살린다며 지출을 늘렸다.

ⓒ연합뉴스
고환율, 고물가, 고금리에 이어 자금 경색 상황마저 발생하면서 정부가 고민에 빠졌다. 사진은 10월17일 경제 규제혁신 TF에서 발언하는 주경호 경제부총리ⓒ연합뉴스

딜레마 시작된 각국 중앙은행들

경제정책의 목표는 하나가 아니다. 물가 안정과 경제성장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물가를 잡기 위한 통화 긴축은 성장과 분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가 상승 초기에 강력한 긴축을 요구하던 여론은 정작 긴축의 충격으로 성장이 주춤하고 분배가 어려워지면 달라진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고민도 시작된다. 언젠가 고비가 한 번 올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조금 빨리 온 느낌이다. 채권시장을 중심으로 불안 심리가 확대되면서 지난해 8월 이후 1년 넘게 기준금리를 계속 올리며 돈줄을 조여온 한국은행이 고민에 빠졌다. 물가 상승 압력을 낮추려면 시중의 유동성을 계속 줄여 나가야 하지만, 지금처럼 자금시장이 불안해지면 인상 폭과 속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0월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책 운영에 관한 전제조건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밝혔다. 긴축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말이 되겠지만 그건 지금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얘기일 뿐이다. 금융시장의 불안이 더 커지면 긴축 속도 조절만이 아니라 한국은행의 유동성 직접 공급에 대한 요구도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긴축적인 통화정책 기조와 어긋난다. 한국은행으로서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한국은행이 허용하기로 한 적격담보대출 확대도 직접적인 유동성 추가 공급은 없다지만 기존의 통화정책 방향과 상충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부로서도 자금시장 경색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일부에서는 사태가 더 심각해질 경우 회사채 시장의 유동성 경색 등에 대한 해법으로 ‘금융안정특별대출 제도’ 재가동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한국은행이 우량 회사채를 담보로 받고 금융사에 대출해 주는 제도로 비상시 유동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다. 이미 발표된 ‘50조원+알파’ 규모의 유동성 지원책도 따지고 보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긴축 기조 방향과는 다르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등을 기관이나 투자자 대신 사들여 기업에 돈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은 한국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며 시장에 풀린 유동성을 줄이고 있는 정책 기조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도 분위기는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미국 채권시장도 연준의 계속된 기준금리 인상과 재정적자로 인해 시장에 쏟아지는 국채 때문에 불안하다. 경기 하강과 고용 불안을 우려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연준의 파월 의장에게 공개적으로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것이 연준의 책무지만 완전 고용도 연준의 책임이며 자칫 과도한 금리 인상으로 실업자가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도 여전하다.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7000억 달러, 학자금 대출 부채 탕감 계획으로 3000억 달러를 쓴다. 미국 재무부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유동성 공급을 위해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영국 중앙은행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9월23일 지금은 물러난 리즈 트러스 총리가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 방침을 발표한 이후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채권시장이 극도로 불안해지자 중앙은행이 나서야 했다. 영국 중앙은행은 시한을 정해 놓고 650억 파운드 규모의 긴급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금리를 인상하고 있었던 기존 정책 기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만약 국채 매입을 지속해 유동성을 계속 확대한다면 인플레이션을 잡는 건 포기해야 했다. 영국 중앙은행의 선택은 연기금의 호소에도 처음에 일시적인 시장 개입이라고 말한 대로 프로그램이 끝난 뒤 바로 국채 매입을 종료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지금 모두가 아는 대로다. 금융시장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트러스 총리는 감세 방침을 포기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사실은 영국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리고 감세를 추진하겠다고 한 것 자체도 긴축 통화정책과의 심각한 엇박자였다.

급격한 금리 인상은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중앙은행으로선 당연한 선택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시장의 안정성은 흔들리기 쉽다. 지금 각국의 중앙은행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는 긴축과 부분적 완화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가 상승 압력을 낮추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동시에 자금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동성을 지원하는, 상반된 목적의 정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시장에 충격 주지 않는 긴축은 없다

우리나라는 대외 충격에 취약한 외환시장과 과다한 가계부채로 대응이 더 어렵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협력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IMF는 원칙적으로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면서도 최종 대부자로서 시장의 안정을 위해 유동성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본다. 효과적인 긴축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시장 충격의 확산이나 흑자 도산과 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질서 있는 금융 긴축(orderly financial tightening)’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취약계층의 채무 상환 능력을 선별적으로 확충해 금리 상승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한다.

한국은행의 추가 기준금리 인상과 세계 경기 하강으로 채권시장 수요는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금융 부실이 초래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충격을 주지 않고 가능한 긴축은 없다. 섣불리 통화정책 기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금융 당국은 시장 불안에도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지원은 긴축의 큰 방향이 흔들리지 않는 수준에서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옳겠다. 지금은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야 하는 시기가 아니다. 유동성 지원은 치밀한 제한이 필요하다. 과감한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부실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고 무조건 구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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