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가치는 왜 ‘히잡’이어야 하는 걸까 [오은경 기고]
  •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06 08:05
  • 호수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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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정권 위협하는 ‘히잡 반대’ 시위 확산
여성 보호 명목이었던 것이 지금은 통제 수단으로 변질돼

‘히잡 착용 불량’이라는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사흘 만에 의문사한 22세 이란 여성 마흐사 아마니로 인해 촉발된 이란의 시위는 좀처럼 그 불길이 잡히지 않고 있다. 두 달째 이어지고 있는 시위는 이란 정부의 강경한 진압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성만 거리로 나선 것이 아니다. 노동자, 소수민족, 대학생,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가세하고 있는 추세다.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고 죽어야 할 만큼 히잡은 그토록 중요한 이슬람의 가치인 걸까.

‘히잡’은 아랍어로 ‘가리다’ 혹은 ‘격리하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무슬림 여성들이 착용하는 베일을 통칭한다. 이란 여성들은 온몸을 가리는 망토형 검은색 베일을 착용하는데, 이를 ‘차도르’라고 한다. 차도르는 원래 ‘덮는다’라는 뜻의 이란어다.

히잡의 기원을 이슬람 종교 전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히잡은 중동 지방에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토착 풍습 가운데 하나였다. 다시 말하면 중동의 뜨거운 햇볕과 모래바람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머리에 두건을 썼다. 머리에 썼던 베일은 자연과 기후 조건에서 보호받기 위한 인간의 자발적인 발명품이었다. 여기에는 신분이나 남녀노소의 구분은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기후 조건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발명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양한 의미로 수용되게 된다.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10월1일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사망한 젊은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에 대한 시위 중 시위대가 도로를 봉쇄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녀 유별’과 ‘여성 보호’ 명목으로 제도화

수메르족은 최초로 고대국가를 출현시켰다. 도시국가의 성장과 군사력의 중요성은 남성이 우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버지를 가장으로 하는 가부장적 가족 구조가 형성되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기능에 따라 사람들은 남성에게 속한 여성과 어느 남성에게도 속하지 않은 여성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도시국가가 자리를 잡아가자 여성에 대한 규제는 갈수록 심화되고 엄격해진다. 먼저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52년경)에서 여성에 대한 통제와 규제가 시작되는데, 아시리아의 법조항(기원전 1200년경)에서 그 내용은 좀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아시리아 법은 베일 착용에 대한 규정을 자세히 명시하고 있다. ‘군주의 아내와 딸은 베일을 써야 한다. 첩들도 역시 베일을 써야 한다. 종교적 의미로 신전에 바쳐진 성창(聖娼)이었다가 이후에 결혼한 여성도 베일을 착용해야 한다. 그러나 매춘부나 노예는 베일을 쓸 수 없다. 만일 불법으로 베일을 쓰다가 적발될 경우에는 태형(笞刑)에 처하거나 귀를 자름으로써 벌한다.’

아시리아 법은 여성이 베일을 언제 착용해야 하고 언제 착용하면 안 되는지를 법조항으로 명시하고 있다. ‘결혼한 여성과 첩,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 노예, 매춘부’ 각각에 대해 베일 착용 규정을 정해 놓고 있다. 베일은 그 여성이 남성에게 속한 여성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다른 남성의 접근을 막고자 경계 표시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성들의 베일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남성 가부장 권력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아시리아의 엄격한 통제로 베일은 이후 그리스·로마를 비롯해 유대교와 비잔틴에 이르기까지 중동 지역에서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 왔다. 다만 베일(히잡)을 제도적으로 정비한 것은 이슬람이다.

무함마드가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을 착용하게 했던 것은 바로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사회문화적으로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보는 남녀유별관과 ‘차이’로 인해 보호받아야 한다고 보는 보호관에 기반한 것이었다. 히즈라 6년에 바누 무스탈리크 정벌에 따라간 무함마드의 부인 아이샤가 조개 목걸이를 잃어버려 본 대열과 떨어져 길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사프완이라는 청년이 그녀를 구해 대열에 합류하도록 도왔다가 불륜이라는 모함을 받았다. 그때 아이샤는 히잡을 착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간통 혐의로 고소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함마드는 아내들과 자유 여성들에게 베일을 쓰도록 명했다. 더구나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베일을 써야만 여성이 보호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슬람 초기에 히잡 착용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히잡 착용을 따르는 사람은 오직 무함마드의 아내들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업을 통해 막강한 부를 축적한 무슬림들이 유입된 공동체에서는 상류층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이슬람 율법에 따라 히잡을 쓰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동화되고자 했던 피지배 계층 여성들에게까지 히잡이 확산되면서 점차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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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0일 이란 테헤란 대학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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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일 테헤란 아미르 카비르 거리에 있는 폐쇄된 쇼핑센터에 경찰이 진입하려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구에 대한 저항으로 다시 등장한 히잡

이슬람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호이자 종교적 의무였던 히잡은 근대 초기에 이르면 서구와 식민 국가의 정체성 사이 갈등의 표상으로 읽히기도 했고, 서구화나 근대화의 척도로 읽히기도 했다. 이란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근대화와 서구화를 지향했던 팔레비 왕조(1925~1979)는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하는 것은 근대화에 장애가 된다고 믿었다. 심지어 1934년에는 히잡 착용을 법으로 금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이슬람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급기야 1979년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을 일으켰다. 이슬람 회귀를 주장하며 권력을 잡은 정권이기 때문에 이슬람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고 그들의 정치 이념과 성과를 효과적으로 선전해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는데 그 최고의 수단은 히잡이었다.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중동의 어느 나라보다도 자유롭고 서구화된 삶을 누리던 이란 여성들은 모두 이슬람 혁명 이후 강제적으로 검은 차도르 안으로 몸을 감춰야 했다. 골목마다 이른바 ‘도덕경찰’이라 불리는 종교경찰이 지키고 있다가 히잡 밖으로 나온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는 등 일제히 단속에 나섰다. 1989년에는 ‘올바르지 않은 베일 착용에 대처하기 위한’ 행정 조례를 포함해 수많은 법안이 상정되기 시작했고, 히잡은 종교적 칙령의 주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히잡 강제령에 반대하면서, 그들의 저항운동은 이슬람 권력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발전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은 일자리를 잃었으며, 태형(74대)을 당하거나, 길거리에서 신체적 공격과 폭행을 당했고,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여기에 이슬람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하메네이는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갖지 말고 출산과 가사에 전념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성들의 일자리는 크게 줄어들어 대졸 여성들의 실업도 남성의 2배인 22.3%에 달한다. 경제 악화에 생계를 위협받는 여성들은 히잡을 두르고 성매매에 나서거나 ‘시게’라는 계약결혼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이슬람 초기에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도화되었던 히잡이 1400여 년이 지난 오늘, 이란에서 오히려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되었다면 그것은 이슬람의 가치 실현일까. 권력자들의 욕망의 끝은 어디인지, 이번 이란 시위를 통해 지켜볼 일이다.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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