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뒤로 가는 대한민국: 권위주의가 부른 비극
  • 최영미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1 17:05
  • 호수 17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태원 참사 열흘이 지났다. 안전하게 월드컵이나 프로야구 이야기를 할까. 이태원을 피해 도망갈 궁리도 해봤으나 그런 무난한 글이 사람들에게 읽힐 것 같지 않다. 나는 사회학자도 정치학자도 아니고, 가끔 시를 쓰며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글쟁이.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기술해 보련다.

작년 봄, 이스라엘에서 코로나19와 관련된 규제를 철폐한 뒤 처음 열린 종교 집회에 군중이 몰려 수십 명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외신을 보며 ‘사람들이 몰리면 위험하구나. 백신 접종률이 높다고 자랑한 이스라엘이 방심하다 당했네. 한국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했는데 내가 틀렸다. 코로나 3년, 젊은이들이 얼마나 놀고 싶었을까. 코로나19 초기에 한국은 K방역의 성공으로 위기를 탈출했다. 지나치다 싶게 엄격한 방역이 지속되어 국민 사이에 피로감이 쌓였고, 확진자 몇만 명이 나와도 무감각해지는 사태에 이르러 올해 봄에 오미크론 유행으로 많은 목숨을 잃었다. 코로나 초기에 (질병관리청 관계자도 인정했듯이) 다소 과장된 규제를 했다가 이번 정부 들어 갑자기 규제를 풀면서 생긴 참사 아닌가.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을 수사하는 이태원 사고 특별수사본부(특수본)의 현판이 11월6일 오전 서울 마포구 경찰청 마포청사 입구에 걸려 있다. ⓒ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을 수사하는 이태원 사고 특별수사본부(특수본)의 현판이 11월6일 오전 서울 마포구 경찰청 마포청사 입구에 걸려 있다.ⓒ연합뉴스

이스라엘 압사 사건 때 경찰과 공무원들도 알았을 텐데, 수만의 인파가 예견되는데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22년 10월29일 저녁 6시34분 한국 이태원에서도 처음 112 신고가 접수되었는데 몇 시간 뒤의 참사를 막지 못했다. 경찰청장은 자느라 상황담당관의 문자를 보지 못했다. 시급한 일을 상관에게 전화해 알려야지, 왜 문자만 보내나. 상관을 지나치게 모시는 권위주의가 문제다. 겉은 21세기 IT 강국이나, 전(前)근대적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 이번에 드러났다. 파출소 직원부터 치안 최고책임자까지 5단계를 거쳐야 보고가 전달되는 사회, 그리고 3단계만 거치면 위급한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사회. 어느 쪽이 위험에 취약한지 상상해 보라.

스마트폰이 없던 1980년대라면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벨 소리에 깨어나 지휘를 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동영상을 찍는 이들, 가게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 위험을 알리는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용산경찰서장은 이태원 일대 차량 정체가 심각한데도 걸어가기 싫어 차량 이동을 고집하느라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

참사 뒤에 일어난 일들도 충격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듣는데 ‘본건’이라는 단어가 걸렸다. ‘이태원 참사’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본건에 대해’라고 했다. 그에게는 이태원 참사가 (대통령이 다뤄야 할) 여러 사건 중 하나인가. 어떤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그의 의식을 보여준다.

정쟁에 몰두하는 한국 사회도 이번 참사의 원인이다. 토요일 광화문에 모여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물어뜯는 집회가 일상화되지 않았다면 경찰 병력이 이태원에 더 배치되지 않았을까.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검찰과 경찰의 갈등도 우리 사회의 위험을 증폭시켰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백만의 시위대가 서울광장에 모였지만,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맞아 죽거나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다치는 젊은이들은 있었으나, 경찰이 오지 않아 죽는 경우는 없었다. 2022년 10월, 이태원의 아이들은 경찰을 믿었으나 경찰은 그들의 믿음을 저버렸다. 2022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국가와 국가의 시스템을 신뢰했으나, 국가는 그들의 믿음을 배신했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b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