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부재한 자리에서 모험을 시작하는 법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2 11:05
  • 호수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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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팬서》의 속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주인공이 떠난 영웅 서사는 어떻게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 11월9일 개봉한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와칸다 포에버》)는 마블 흑인 영웅의 탄생을 성공적으로 알렸던 《블랙 팬서》(2018)의 속편이다. 전 세계적인 흥행에 힘입어 새로운 각본이 나왔지만, 2020년 8월 주연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결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전면 수정에 돌입했던 프로젝트다. 이번 영화는 보스만이 남긴 거대한 부재를 안은 채로 세계관을 이어가려는 시도다. 결과적으로 이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고,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 확장이기도 하다. 《블랙 위도우》(2021)로 시작해 최근 《토르: 러브 앤 썬더》(2022)까지 이어진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4를 닫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품이 짊어져야 했던 무게가 작지 않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와칸다 그리고 탈로칸이라는 새로운 배경

거대한 슬픔이 영화를 감싸고 있다. 마치 작품 전체가 길고 장엄한 하나의 애도 의식처럼 느껴질 정도다. 매 작품의 초입에서 그간 MCU를 빛내온 영웅들의 활약상을 채워 보여주는 마블의 리더 필름은 생전 채드윅 보스만이 연기한 블랙 팬서의 장면들만 모아 제시된다.

《와칸다 포에버》는 첫 장면부터 영웅의 부재를 인정한다. 전편에서 와칸다 왕국의 공주이자 뛰어난 과학자로 소개됐던 슈리(레티티아 라이트)는 오빠 티찰라를 구하기 위한 치료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는 화면 밖에서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인물들이 촌각을 다투는 이 장면은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것이 아니다. 티찰라가 살아나지 못할 것임은 명백하며, 이는 화면 밖의 현실과 공명하며 채드윅 보스만의 부재라는 명백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과정에 가깝다. 이어 와칸다의 왕국과 국민이 왕의 국장을 치르는 장면은 ‘1대 블랙 팬서’ 보스만을 애도하며 떠나보내는 이 영화만의 방식이다.

아프리카의 빈민국으로 위장한 와칸다가 실은 비브라늄(MCU에 등장하는 금속으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블랙 팬서의 슈트 등을 제작할 수 있는 최강의 물질)을 수호하는 기술 강국이라는 세계관은 1편에서 이미 밝혀진 바다. 전편은 와칸다가 국제사회에 합류하는 것에 합의하면서 끝을 맺었다. 빗장을 연 결과는 냉혹하다. 어머니 로몬다(안젤라 바셋)는 블랙 팬서의 보호 없이도 와칸다가 국제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자립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비브라늄을 노리는 강대국들의 음모는 계속 노골적이다.

여기에서 《와칸다 포에버》는 새로운 배경인 탈로칸을 소개한다. 세계 무대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고도로 발전한 기술 문명국가가 와칸다 하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틀란티스를 연상케 하는 수중 제국 탈로칸은 과거 와칸다와 마찬가지로 파괴적 식민주의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방어적 고립을 택하고 있다. 비브라늄을 둘러싼 서방세계의 위협을 감지한 탈로칸의 지도자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는 자신들의 동맹이 되어 먼저 그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와칸다에 선포한다.

이번 편에서 새롭게 등장한 공간인 탈로칸은 가공할 수중 액션을 선보이는 배경으로도 기능하지만, 유색인종의 역사와 정치적 맥락을 연결시킨 전편의 시도를 이어받는 장치이기도 하다. 와칸다와 탈로칸 사이의 갈등은 어느 한쪽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존을 바라보는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들의 상황은 서방국가의 위력에 의한 내부 갈등, 무력 사용에 따른 보복 공격 등 현실세계의 정치적 은유로 읽힌다. 탈로칸의 지도자 네이머는 코믹스에 1939년 처음 등장한 유서 깊은 캐릭터다. 마야 문명의 후계자로 등장하는 그는 바다와 육지에서 강인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하늘로 날아오르는 힘까지 갖췄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한 장면ⓒ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여성 영웅의 성장과 남은 과제들

타이틀롤 배우의 부재를 인정하는 한편 인기 프랜차이즈의 속편을 이어가야 하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 마블 스튜디오 입장에서 《와칸다 포에버》가 새롭게 선택한 서사는 일단 최선의 결과로 보인다. 블랙 팬서 역을 다른 배우로 대체하는 것으로 시리즈를 이어나가려던 계획은 팬들의 반대에 부닥쳐 진작에 무산된 뒤다. MCU의 캐릭터들은 세계관 안에서 각각의 작품과 긴밀한 연결성을 갖기 때문에 애초에 쉽지 않은 방식이다. 《블랙 팬서》 개별 작품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티찰라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슈리를 비롯한 강인한 여성들이다. 어머니 로몬다를 비롯해 왕실을 수호하는 근위대 ‘도라 밀라제’의 리더인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티찰라의 연인이자 최고의 스파이 나키아(루티파 뇽오) 등이 와칸다를 수호하기 위해 사활을 건다. 가장 눈에 띄게 성장하는 인물은 역시 슈리다. 전편에서는 장난기 많은 과학자였지만, 이제는 한 왕국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다. 가족을 잃은 젊은 여성이 자기 자신과 나아가 하나의 세계를 보존하는 과정,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것과는 달리 품격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와칸다 포에버》는 여성 중심의 세계관으로 넓어져온 MCU 페이즈4의 폭을 가장 적극적이고도 넉넉하게 넓혀 놓는다.

이번 영화는 ‘2대 아이언맨’을 소개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비브라늄 감지기 개발자로 등장하는 전체 소녀 리리 윌리엄스(도미니크 손)가 그 주인공이다. 리리는 마블이 곧 드라마로 선보이는 《아이언하트》의 주인공이다. 젊은 흑인 여성이자 천재 과학자 역할이라는 공통점을 갖는 슈리와 리리가 연구실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는 장면은, 영화의 전체적 액션 설계보다 흥미롭게 보이는 구석마저 있다.

2시간40분의 긴 러닝타임 안에서 풀어내야 할 드라마가 많다 보니 전개는 느리게 느껴지고, 본격적인 액션 시퀀스에 이르러 힘이 달리는 구석이 없지 않다. ‘2대 블랙 팬서’의 등장과 본편 이후 이어지는 쿠키 영상에서 감지되는 미래의 블랙 팬서는 안전함과 안일함 사이의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왕을 잃은 와칸다의 위기가 채드윅 보스만이 없는 시리즈의 상황과 나란한 가운데, 《와칸다 포에버》 입지는 혼란을 수습하고 명맥을 잇는 가교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데 충실하다. 시리즈 향방의 평가는 이후에라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주연배우를 잃은 영화들의 선택

불행하게도 배우들이 작품의 촬영이나 공개를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경우는 《블랙 팬서》 시리즈만이 아니다. 《분노의 질주: 더 세븐》(2015)은 촬영 중 주연배우 폴 워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이 영화는 워커의 형제가 남은 분량의 촬영을 마친 뒤 배우의 얼굴을 합성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그가 연기한 캐릭터인 브라이언을 시리즈 전체에서 죽음 없이 적절하게 퇴장하게 하는 서사로 최고의 애도이자 헌사를 보여줬다.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 워커》(2020)는 레아 공주 역의 캐리 피셔를 떠나보냈지만,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에서의 미공개 촬영 분량과 VFX를 활용해 그의 빈자리를 채웠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는 공개 전에 유명을 달리한 배우 히스 레저를 위한 아카데미 시상식 캠페인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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