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가족 없이 사망했는데 후손에 의해 서훈?…광복군 ‘공적 가로채기’ 의혹
  • 이원석 기자 (lws@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4 07:35
  • 호수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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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간부 출신 장이호 지사, 동명이인 후손에 의해 공적 빼앗겼다는 의혹 제기
후손으로 알려진 장병화씨 “몰랐다…이름 같아 동일인으로 알아” 해명

한국광복군의 전신 격인 한국청년전지공작대부터 항일 무장운동에 투신해 광복군 제2지대 분대장 등을 지낸 평안북도 출신 고(故) 장이호 지사의 공적이 가로채기됐다는 의혹이 최근에 제기됐다. 광복군 내 동명이인의 후손이 간부 출신 장이호 지사의 업적을 마치 자신의 선친 업적인 것처럼 가져갔다는 논란이다. 시사저널은 각종 사료를 분석하고, 다방면으로 취재한 결과 동명이인인 광복군 3지대 대원 장이호 지사의 후손에 의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실제 2지대 장이호 지사의 공적이 도용돼 왔던 정황을 확인했다.  

ⓒ광복군기념사업회 제공
광복군 2지대 간부 장이호 지사의 기록은 사진을 비롯해 여러 1차 자료가 남아있다. 특히 2지대 장이호 지사는 안경을 착용했다. 장이호 지사 옆으로 철기 이범석 장군(1열 4번째)이 앉아있다. ⓒ광복군기념사업회 제공

2지대와 3지대에 동명이인 장이호 존재

2지대 간부였던 장이호 지사는 청년전지공작대 출신이다. 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국 중경(충칭)에서 결성된 청년들의 항일 무장단체로 1940년 9월17일 광복군의 주력 전투부대로 정식 편제됐다. 1939년 결성된 광복군은 초창기엔 수뇌부 등 간부급만 존재했고 일반 병력이 없었으나 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며 정식 군대로서의 모습을 갖췄다. 청년전지공작대는 최초엔 광복군 5지대로 편제됐다가 1942년 2지대로 개편됐다.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1900~1972)이 2지대 지휘관을 지냈다.

광복군 2지대의 핵심 간부였던 고 이재현 지사(1917~1997)의 기록을 엮은 ‘한국광복군 2지대사’와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청년전지공작대 소속이던 장이호 지사는 1939년 중국중앙전시간부훈련단 한청반(韓靑班)에서 훈련을 받았고, 낙양(중국 허난성 뤄양시) 부근에서 정보·작전·초모 등의 활동에 투입돼 활발한 공작을 전개했다. 독립운동사 6권엔 장 지사가 1944년 12월에도 여러 청년을 포섭해 현지에서 공작에 참여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임시정부에서 공식 작성한 문건 등 시사저널이 확인한 여러 사료엔 그가 1945년 광복 때까지 2지대 1분대장(낙양 분대)으로 활동했다고 나와 있다. 이범석 장군, 2지대원들과 찍은 그의 사진도 여러 장 존재한다.

장이호라는 인물에 대해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가 온라인 등에 공개하고 있는 공적조서에 따르면 포상을 받은 장이호 지사는 2지대 간부 출신 장이호의 공적과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 9월17일 광복군에 입대해 8·15(광복)까지 지하공작 활동함’이라고 적혀 있다. 1940년 9월 입대했다는 기록은 해당 인물이 청년전지공작대 출신이었다는 점을 입증한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청년전지공작대 출신 광복군 중 장이호는 단 한 명이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문으로 과거 사료, 제출된 공적서 등을 바탕으로 기록된다. 독립유공자 선정과 포상은 원칙적으로 신청제다. 다만 현대에 들어와선 정부가 직접 발굴하기도 한다. 장이호 지사가 서훈을 받은 1970년대엔 거의 대부분이 본인이나 유족 등의 신청으로 포상이 이뤄졌다. 누군가 장이호 지사에 대한 포상을 신청했다는 얘기다.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장이호 지사의 후손은 이미 대중에 알려져 있다. 중소기업 음향기기 제조업체 가락전자의 장병화 회장이다. 그는 현재 광복군유족회 회장, 광복회 이사,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고 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등 여러 독립 유공자 관련 단체의 임원을 역임했다. 2008년 통합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공천심사위원, 이재명 성남시장 당시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각종 언론 보도와 인터뷰 등에서 그는 광복군 2지대 출신 간부 장이호 지사의 아들로 표현된다. 장병화 회장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선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는 열아홉 나이에 고향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광복군을 찾아가셨어요. 중국군관학교 한청반에서 4년간 간부훈련을 받으셨어요. 이후 광복군 2지대에 투신해 일본군을 상대로 기밀탐지와 지하공작 등을 하셨어요. 1944년 광복군 제3지대 분대장이 되어, 동지들과 함게 광복군 신병 모집을 하시며 김준엽·장준하 등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하셨죠. 해방 직전인 1945년엔 서주지구 일본군 부대에 배치된 조선인 학도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한미 합작 전략특수(OSS) 훈련을 받았는데 일제가 항복하면서 작전이 취소되어 귀국을 준비하셨어요.”

대부분이 2지대 장이호 지사의 공적과 일치하는 설명이다. 장 회장은 이후 선친이 귀국해 1947년 모친과 결혼해 자신을 낳았고, 1950년 6·25 전쟁 도중 인민군에 의해 살해됐다고 말했다.

광복군 간부 장이호 지사에 대한 사망 소식을 전하며 ‘사고무친(가족도 친지도 없음)하여 김구, 조소앙 등이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는 1946년 12월 여러 신문의  보도다. 왼쪽 위부터 자유신문, 동아일보, 한성일보의 당시 신문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광복군 간부 장이호 지사에 대한 사망 소식을 전하며 ‘사고무친(가족도 친지도 없음)하여 김구, 조소앙 등이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는 1946년 12월 여러 신문의 보도다. 왼쪽 위부터 자유신문, 동아일보, 한성일보의 당시 신문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6년 광복군 간부 장이호 사망해 김구가 장례”

그런데 시사저널은 대한독립신문, 한성일보, 자유신문, 동아일보 등 다수 신문의 1946년 12월 보도에서 2지대 간부 출신 장 지사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아무런 가족이나 친지도 없이 쓸쓸히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신문의 내용은 거의 유사했는데, 종합하면 이렇다.

‘중국 낙양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광복군 간부로 조국 광복을 위해 왜적과 싸워오다가 저번에 귀국해 건국 운동에 활약하던 장이호씨는 모 운동에 종사 중 불의에 흉탄에 맞아 안타깝게 영면하였는데 장씨는 사고무친(가족이나 친지가 없음)하고 고향은 삼팔이북(평북)에 있는 관계로 장씨의 동지를 대표해 김구, 조소앙, 이범석 등이 원조를 받아 장례를 치르기 위해 준비 중이다.’ 1946년 가족도 친지도 없이 사망한 인물이 어떻게 1947년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 수 있었을까.

본지 취재에 따르면, 장병화 회장의 선친은 광복군 내 동명이인인 또 다른 장이호 지사로 추정된다. 시사저널은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이 속해 있는 광복군기념사업회(舊광복군동지회)를 통해 ‘한국광복군총사령부명단’을 확보했다. 해당 명단엔 입대일이 다른 장이호(張利浩)가 두 명이다. 2지대 간부로 1940년 9월17일이 공식 입대일인 장이호와, 3지대원으로 입대일이 1943년 12월로 기록돼 있는 또 다른 장이호다. 두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진들을 비교해 봐도 외모가 상이하다.

장병화 회장이 선친이라며 제공한 사진이다. 2지대 장이호 지사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장병화 회장 제공

3지대원 장이호 지사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해서도 일부 기록이 존재한다. 2지대 간부 장이호에 대한 기록도 나와 있는 독립운동사 6권에는 광복군 3지대에 대해 다루면서 3지대원 장이호를 언급한다. 1945년 4월 대원 김병학이 서주 지역에서 ‘장이호 등과 밀접한 연락망을 구축하는 동시’ 공작 계획을 추진했다는 내용과, 1945년 5월 일본군에 의해 징집돼온 학도병을 ‘장이호 등으로 인솔 탈출하게 했다’는 내용, 또 장이호가 서주 지역으로 파견됐다는 내용이다.

다만 3지대원 장이호의 기록에 대해선 일부 논란이 있다. 입대 일자 등 기록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실제 과거 광복군동지회 등에 제출된 장이호 지사 관련 문건에도 입대일(1944년 7월) 등 내용에 차이가 있다. 해당 문건은 장병화 회장이 직접 선친의 공적 및 인적사항 등을 기술한 것이다.

1946년 사망한 이가 2지대 간부 출신 장이호라면 장병화 회장의 실제 선친은 3지대원 장이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장 지사에 대한 공훈 기록과 언론 인터뷰를 통한 장 회장의 설명 등을 살펴보면 2지대 장이호와 3지대 장이호의 공적이 뒤섞여 있다. 특히 현재 배우자(장병화 회장 모친)와 함께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자 묘역에 안장돼 있는 장이호 지사의 묘석에도 ‘1940년 제2지대 입대’ 등 2지대 간부 출신 장이호 지사의 공적이 적혀 있다.

아울러 정부는 장이호 지사에게 애국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애국장은 수형기간 4년 이상, 활동기간 5년 이상 유공자들에게 포상한다. 기준은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인데 여러 기록에 의하면 3지대 장이호 지사의 경우엔 기준에 못 미친다.

 

동명이인 공적 뒤섞여…후손들 정말 몰랐나

여러 기록이 존재함에도 후손들은 정말 동명이인의 존재를 몰랐을까. 계급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로 인해 다른 이의 공적 혹은 존재가 사라져선 안 된다. 시사저널은 해명을 듣기 위해 11월10일 장병화 회장을 직접 찾았다. 장 회장은 동명이인 2지대 간부 출신 장이호 지사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자신의 선친 고향 역시 평북 신의주라고 했다.

장 회장은 20대 후반이던 1970년대 광복군동지회를 찾아 선친의 3지대 전우들을 만났고, 그들의 인우보증을 통해 선친인 장이호 지사에 대한 포상을 신청해 서훈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장 회장은 “포상을 신청할 때 전우분들이 써준 공적서엔 분명 선친의 (3지대에서의)활동들만 적혀 있었다”고 강조했다. 포상엔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그러나 공식적인 포상 기록인 공적조서엔 2지대 장이호 지사의 기록이 남아있다.

의문이 남는 건 장 회장이 선친의 전우들, 그리고 모친으로부터 들었을 선친의 이야기와 기록으로 남아있는 2지대 간부 장이호 지사의 기록엔 차이가 있었을 수밖에 없음에도 어떻게 이를 인지하지 못했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 장 회장은 “어렸을 적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했다”면서 “기록에 같은 이름이 있으니 당연히 선친의 기록으로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장 회장은 “실제로 동명이인이 있다면 그분도 훌륭한 분이실 테고, 서훈을 받으셔야 한다”면서도 “학술적으로 확인 작업을 맡겨놨다. 그 전까진 누구도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이호 지사 후손으로 알려져 온 장병화 가락전자 회장ⓒ
장이호 지사 후손으로 알려져 온 장병화 가락전자 회장ⓒ시사저널 임준선

일각에선 동명이인의 공적이 뒤섞여 마치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서훈이 이뤄진 것에 대해 보훈처(1985년 이전 원호처)의 유공자 검증, 서훈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훈처 관계자는 통화에서 “현실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으니 과거 인우보증 등을 통해 많은 분이 서훈을 신청하면서 ‘가짜 유공자’ ‘부풀리기’ 등이 있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는 듯하다”면서 “제보가 들어오거나 언론에 제기되는 부분들에 대해선 계속해서 다시 조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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