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탈출’ 감행했던 곤, 끝나지 않은 도주극
  •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9 12:05
  • 호수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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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자금력으로 전문가들 섭외…장소·시기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
악기상자에 숨어 전세기 타고 일본→터키→레바논으로...조력자는 처벌돼

김봉현 전 회장이 구속 심사를 앞두고 도주해 검경의 추적을 받던 2020년 1월, ‘세기의 도망자’가 지구 반대편에서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며 대담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카를로스 곤 전 닛산(日産)자동차 회장은 2020년 1월8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일본 대탈출 성공’의 축포를 터트렸다.

일본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재판을 받던 그가 어떻게 단숨에 레바논으로 건너갔을까. 막대한 자금력에 바탕한 전문가들의 조력,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한 탈출극이었다. 

곤 전 회장은 2018년 11월 연봉을 축소 신고하는 등 유가증권 보고서 허위기재와 특별배임 혐의로 공항에서 긴급 체포된 후 구속됐다. 취임 4년 만에 대규모 부채를 청산해 ‘경영의 신’으로 불린 곤 전 회장은 도쿄지검 특수부 수사와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일본에서 특별배임 등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레바논으로 도주한 카를로스 곤 전 닛산자동차 회장이 2020년 1월8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 기자회견장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AP 연합

곤 전 회장은 10억 엔의 보석금을 내고 2019년 3월 풀려났다. 그는 이후 재구속, 추가 보석 청구를 거쳐 4월에 조건부 석방된 뒤 가택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렸다. 수개월간 도쿄 자택과 시내에 있는 호텔을 오가며 ‘예측 가능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던 중 곤 전 회장은 돌연 닛산 측이 고용한 사설 경비업체가 불법으로 자신을 감시한다며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고소 예고에 곤 회장에 대한 추적과 감시는 일시 중단됐다.

감시가 느슨해진 직후인 그해 12월29일 오후, 곤 전 회장은 자택에서 나와 평상시와 같이 호텔로 향했다. 곤 전 회장은 이날 호텔에서 레바논으로의 대탈출을 기획한 인물과 조력자들을 만난다. 옷을 바꿔 입은 곤 전 회장은 이들과 함께 택시와 신칸센을 이용해 간사이공항으로 이동한다. 조력자들의 정체는 미국 특수부대 출신의 마이클 테일러와 그의 아들 피터 테일러였다. 곤 전 회장의 부인 캐롤 곤이 이들 부자(父子)에게 15억원가량을 주고 탈출을 의뢰한 것으로 확인됐다.

테일러 부자가 고안한 탈출 방법은 곤 전 회장을 ‘위탁 수하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부자는 간사이공항 인근 호텔에서 ‘악기 상자’ 속에 곤 전 회장을 숨긴 뒤 공항으로 이동했다. 관건은 검색대 통과. 테일러는 검색대에서 수하물에 대한 ‘X선 검사’를 거부했다. 섬세한 악기가 들어있는 상자를 위로 들어올리다 망가질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이 모든 것은 치밀한 계획하에 이뤄졌다. 조력자들은 사전에 일본 공항 10곳을 답사해 보안이 가장 취약한 간사이공항을 대탈출 실행지로 선정했다. ‘택일’도 신중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연휴가 이어지는 시점을 노렸다. 공항 직원이 휴가로 대거 자리를 비워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대체 인력이 가장 많은 시기를 노린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나무 상자 안에 몸을 숨긴 곤 전 회장은 검색대를 무사 통과해 대기 중이던 전세기 탑승에 성공했다.

훗날 곤 전 회장은 “비행기에서 이륙하는 순간을 기다린 30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기다림이었다”고 회상했다. 곤 전 회장과 조력자들은 간사이공항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도주했고, 이스탄불에서 또 다른 전세기를 이용해 레바논 베이루트로 이동했다.

2019년 12월말 곤 전 회장의 도주 소식이 해외 언론을 통해 긴급 타전되면서 일본 정부와 검찰은 발칵 뒤집혔다. 곤 전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적으로 일본 사법제도와 검찰의 강압적 수사 행태, 정치권과 수사기관의 합작으로 희생양이 됐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연일 곤혹스러운 상황이 펼쳐졌다.

곤 전 회장은 일본 탈출 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레바논에 머물고 있다. 레바논과 일본은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 프랑스 검찰도 곤 전 회장에 대한 국제체포영장을 발부했지만 아직 집행되지 않고 있다. 그의 도주를 도운 테일러 부자와 터키 민간 항공 조종사 등은 체포돼 징역형 등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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