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 앤 올》, 러브 이즈 올(Love is all)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03 17:05
  • 호수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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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당신을 덜 외롭게 하리라

루카 구아다니노의 관능적인 로맨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에서 올리버(아미 해머)는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에게 속삭였다.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것. 이것은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루카 구아다니노와 티모시 샬라메가 다시 호흡을 맞춘 《본즈 앤 올》은 한발 더 나아간다. 

리(티모시 샬라메)는 매런(테일러 러셀)에게 말한다. “나를 먹어 줘. 뼈와 모든 걸(Bones and All).”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진짜로 나의 뼈와 살을 남김없이 입으로 먹어 달라는 부탁이다. 그리고 믿기 힘들겠지만, 이것은 ‘절절한 사랑 고백’이다. ‘당신이라는 타인’과 ‘당신에게 타인인 나’가 완벽한 하나가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게 이 섬뜩한 부탁이 사랑 고백이 되는가. 《본즈 앤 올》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아가는 영화다. ‘식인’이라는 소재 때문에 관람을 일찍이 포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외면하지 않고 이들의 여정에 동행한다면 장담컨대 리의 저 나지막한 외침이 당신의 심장을 먹먹하게 물들일 것이다. 

영화 《본즈 앤 올》 한 장면ⓒ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특별한 소재로 전하는 보편적 이야기 

인간은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어 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러나 어떤 인간에겐 그런 감정조차 사치다. 매런이 그렇다. ‘이터(eater)’라는, 사람을 먹는, 괴기한 본능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그녀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안의 숨은 본능이 튀어나올 때마다 매런은 스스로를 증오하고 혐오한다. 이 넓은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사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나마 곁에 머물러주던 아빠마저 홀연히 떠나면서 매런은 정말 혼자가 된다. 매런에게 남은 건 아빠가 떠나면서 남긴 생모의 흔적. 매런은 엄마를 찾아 미국 미네소타주로 향한다. 그것은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 된다. 매런은 길 위에서 리를 만난다. 그들은 서로를 첫눈에 알아본다. 나와 같은 식성을 가진 사람, 나와 같은 종족,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구나. 

카미유 드 안젤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본즈 앤 올》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티모시 샬라메의 만남만으로도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한 프로젝트다. 이들인 선택한 소재가 ‘식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궁금증은 더 커졌다. 구아다니노가 누구인가. 탐미적인 영상을 담아내는 데 도가 튼 대가 아닌가. 샬라메는 또 어떤가. 지구상의 생명체가 아닌 얼굴을 하고선 대중을 홀려온 매혹의 배우다. 그래서다. 식인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기존 ‘카니발리즘(cannibalism·동족을 서로 잡아먹는 식인 행위)’ 영화와는 다르리라는 예감을 품게 한 건. 

예상은 엇나가지 않는다. 이 영화를 뭐라고 해야 할까. 핏빛 아름다움? 잔혹한 황홀? 참혹한 서정? 엽기적인 숭고함? 《본즈 앤 올》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형용모순의 감정을 기어코 납득시킨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먹는 고어(gore)한 장면에 눈을 감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즈 앤 올》에서의 식인 장면은 과시적이거나 전시적이지 않고, ‘허기짐’보다는 ‘공허함’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으며, 피가 흘러넘치는 순간에서조차 연민의 정서를 내뿜고 있기에 잔인함의 정도가 덜하게 다가온다. 매런과 리의 목표가 되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보다, 그 과정에서 매런과 리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더 강하게 드는 건 이러한 연유에 기인한다. 

《본즈 앤 올》은 도발적인 소재를 가져왔을 뿐, 그 안에서 누구나 생각해 봄직한 보편적인 질문을 꿰매는 영화다. 실제로 루카 감독이 원작 소설에서 주목한 건 식인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 주변부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두 사람”이었다. 자신들이 제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타자화된 존재들. 얼핏 특정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우린 누구나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기 힘든 자기만의 영역을 하나쯤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터’는 우리들 안에 있는 연약한 부분을 관통한다. 

영화 《본즈 앤 올》 한 장면ⓒ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본즈 앤 올》 한 장면ⓒ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무엇보다, 러브 스토리 

자연스럽게 영화 《본즈 앤 올》에서 감지되는 건 ‘고독’과 ‘결핍’이다. 매런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남들과 다른지,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지 자문하지만 매번 넘을 수 없는 벽과 마주한다. 사회 시스템에서 이미 밀려난 리 역시 다르지 않다. 태생부터 쥐어진 것과 사회가 규정한 것들 사이의 거대한 괴리와 충돌. 금기된 것과 아슬아슬하게 동거해야 하는 ‘이터’에게 외로움과 정체성 혼란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고독 속에서 《본즈 앤 올》이 길어 올리는 건 사랑이다. 리가 매런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매런은 리의 얼어있던 내면에 불을 켜준다. 매런이 리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면, 리는 온전히 자신을 껴안아주는 매런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한다. 

《본즈 앤 올》은 고어부터 멜로, 성장물. 로드무비까지, 굳이 하려면 장르를 쪼개서 바라볼 수 있는 영화다. 그런데 이걸 일일이 세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이 모든 장르는 하나로 움직인다. 그러니까 장르와 장르가 서로를 위협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질감이 섞임으로써 이들의 사랑을 ‘온리 원(only one)’으로 만든다. 장르를 잘 접합해낸 영화들이 그동안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본즈 앤 올》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수준급인 장르 이합을 보여준다. 동시에 루카 구아다니노 작품 세계의 규합으로도 보인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성장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껴안고, 《아이 엠 러브》의 탐미적인 이미지를 풍기며, 불온한 기운이 가득했던 《서스페리아》를 경유해 당도한 세계가 《본즈 앤 올》이다. 

이 영화에서 티모시 샬라메는 그의 매력을 숨김없이 끄집어낸다. 반항적이지만 고독하고 퇴폐적인 동시에 순수해 보이는 얼굴을. 무엇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티모시 샬라메 사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이다. 티모시 샬라메가 지니고 있는 중성적인 동시에 섹슈얼한 느낌을 이번 영화 안에서도 홀리듯 풀어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엔딩으로 꼬리 긴 여운을 남겼던 티모시 샬라메는 이번 영화에서도 쉽게 잊히지 않을 또 하나의 강력한 엔딩을 자신의 필모그라피에 새긴다. 이 정도면 ‘엔딩 요정’ 아닌가. 

그런 티모시 샬라메 옆에 선 테일러 러셀은 존재감이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의 아우라를 당당하게 드러낸다. 카메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도 매력적이지만,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능력도 예사롭지 않다.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얼굴이 분명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티모시 샬라메를 발굴한 영화라면, 《본즈 앤 올》은 테일러 러셀과 통성명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본즈 앤 올》에는 매런과 리 외에도 여러 명의 ‘이터’가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매런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선택지들이다. 세상이 불온하게 바라보는 습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터’ 중 누군가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누군가는 고독 자체를 외면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탐닉하고, 누군가는 방랑하며 지낸다. 어떤 삶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알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적어도, 사랑이 당신을 덜 외롭게 하리라는 것. 《본즈 앤 올》은 그래서 이렇게도 읽힌다. ‘러브 이즈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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