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시아 축구의 매운맛
  • 최영미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2.12.09 17:05
  • 호수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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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월드컵에서 아시아의 매운맛을 보여준 선수들이 무척 자랑스럽다. 브라질이라는 큰 산을 넘지는 못했지만 실망하지 말자. 경기가 끝난 뒤 운동장에서 고개를 떨군 선수들. ‘국민들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하다’는 손흥민 선수의 인터뷰를 보며 마음이 짠했다. 왜 선수들이 국민들에게 죄송해야 하나.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데, 월드컵에서 1승도 하지 못한 나라들이 수두룩하다.

후반에 들어간 백승호 선수를 보고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브라질의 골망을 흔든 그의 골은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살린 소중한 골. 월드컵을 앞두고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백승호 선수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썼는데, 내 예언이 맞아서 더 기쁘다.

12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룬 한국 축구대표팀이 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기념 촬영하고 있다.ⓒ연합뉴스
12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룬 한국 축구대표팀이 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기념 촬영하고 있다.ⓒ연합뉴스

중동에서 처음 개최되는 카타르월드컵을 앞두고 서방 언론들은 ‘카타르의 축구장 건설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 6000여 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하는 인권 후진국 카타르’ 등 부정적인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월드컵 개막 하루 전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인 지아니 인판티노(Gianni Infantino)의 아주 시적인 한마디로 이전의 논란들이 잠잠해졌다.

“오늘 나는 아시아인, 오늘 나는 아프리카, 오늘 나는 동성애자(Today I feel Asia. Today I feel Africa…)”라고 포문을 열며 그는 카타르의 인권침해를 말하는 서방 언론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공격했다.

아랍의 고유한 문화를 보여준 개막식도 감동적이었다.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메시지. 개막을 알리는 카타르 국왕의 입에서 나온 ‘알라 신’을 전 세계가 들었다. 월드컵 개막식에 ‘알라 신’이 등장하다니. 이번 월드컵은 중동의 미래를 바꾸고, 어쩌면 세계사를 바꿀지도 모른다. 카타르월드컵은 더 많은 사람이 이슬람과 아랍문화에 친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 문화에 적대적이거나 관심이 없었던) 유럽의 축구팬들이 카타르 전통 모자를 쓰고 경기장에 앉아있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아르헨티나를 꺾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경기 그 이상의 무게가 느껴진 이란 대표팀을 보며 나는 아랍 팀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내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응원할 줄이야. 축구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92년 월드컵 역사상 처음 여성 심판들이 독일과 코스타리카 경기의 주·부심을 맡는다는 뉴스를 보고, 여성이 휘슬을 부는 현장을 보려고 새벽에 깨어 채널을 돌렸다. 대한민국의 지상파 3사는 그날 그 시간에 모두 일본과 스페인 경기를 생중계해, 프라파르 심판이 관장하는 독일과 코스타리카의 조별리그 경기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재방송이라도 볼까 싶어 다음 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으나, 짤막한 하이라이트만 나오지 우리나라 언론이 그렇게 떠들어대던 ‘최초의 여성 심판’이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지상파 방송 3사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SBS, MBC, 그리고 KBS에도 생방송 월드컵 경기 중계에 참여하는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아나운서도 해설진도 모두 남자!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송이라니. 월드컵 경기 중계 전후로 방송국에서 미리 만들어 내보내는 (자사 중계진이 얼마나 화려한지를 보여주는) 홍보용 영상 사진도 보기 불편했다. 조폭처럼 똑같은 양복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신사들이 위압적인 포즈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월드컵이 남성들만의 축제인가. 여성 축구팬이 얼마나 많은데….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b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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