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이분법’ 도덕정치가 한국 정치를 망친다 [채진원 기고]
  •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1.02 13:05
  • 호수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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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적’으로만 상정하니 ‘민주주의’ 설 자리 잃어
진영논리→적대정치→포퓰리즘→민생 악화 ‘악순환’

2023년에는 여야 협치가 실현될까? 0.73%포인트 차이로 승리가 결정된 20대 대선에서 국민은 절묘한 견제와 균형을 선택했다. 선거 결과의 의미는 윤석열 정부가 일방적 국정운영을 피하고,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다수파인 현실을 인정해 여야 협치를 통해 경제 활성화와 민생 회복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유감스럽게도 새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은 국민이 원하는 협치에 이르지 못하면서 정치 불신을 자초했다. ‘검수완박’에 맞서는 한동훈 법무장관 임명, ‘이재명 사법 리스크’ 방탄 공방 등을 놓고 여야는 강대강으로 부딪쳤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에 합의해 놓고도 책임 공방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대통령이 지난 연말 단행한 특별사면에 대해서도 여야는 강하게 부딪쳤다. 여당은 “통합을 지향한 결단”이라고 평가했지만, 야당은 “부패세력과 적폐세력을 풀어준 ‘묻지마 대방출’”이라고 비판했다. 

정치 불신은 무당파와 중도파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무당파 비율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2022년 4월 2주에 15%로 연 최저점을 찍었으나, 10월 1주에 30%로 두 배 증가해 현재도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2월(1~3주) 중도파 비율은 32%로 진보(29%)와 보수(26%)보다 많다. 특히 지난 서울시장 선거와 대선의 승패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20대 연령에서 무당파 비율은 45%로 국민의힘(24%)과 민주당(25%)을 앞섰다.

전국경실련 관계자들이 2022년 12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대 정치개혁 과제 제안 및 정개특위 안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대를 적폐로 찍어 ‘마녀사냥’ 하는 적대정치

오죽했으면 교수들이 ‘2022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선정했을까. 과이불개를 추천한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여야 할 것 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이전 정부는 더 잘못했다’ ‘야당 탄압’이라고 말하고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이불개는 이태원 참사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정치권의 무책임한 행태에 매를 드는 경구다.

한마디로 2022년 정치권은 민생을 챙기는 데 실패했다.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프레임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사사건건 이전투구와 당리당략으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우리 정치가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적대정치의 늪에 빠지게 됐을까? 여러 의견이 있지만 그 핵심에는 대화와 타협 및 상호존중이라는 민주주의 규범과 충돌하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는 조선 사대부식 ‘도덕정치 습속’의 작동이 자리한다. 

정치권은 여전히 조선 성리학적 습속대로 상대를 적폐로 찍어 마녀사냥으로 죽이고, 살아남은 자들이 가해자에게 보복하는 복수정치를 반복하고 있다. 대인배와 소인배로 우열을 나누는 ‘성인군자론’과 중화 밖의 오랑캐를 혐오하는 ‘소중화주의’로 무장한 조선 사대부들은 ‘성인군자는 선(정의=진실=공(公)=정상=도덕)이고, 소인배는 악(부정의=거짓=사(邪)=비정상=부도덕)’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사농공상의 차별적 질서를 정당화한 바 있다. 선악을 갈라 상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유교 습속의 세계관에선 개인의 자유와 평등 및 연대를 가치로 하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및 공화주의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똑같은 행위를 하고도 ‘내가 하면 정의’ ‘상대가 하면 부정의’로 몰아 경쟁자를 궤멸시켜야 할 적폐나 적으로 극단화하는 유교적 도덕정치는 민주주의 규범인 대화와 타협에 기초한 공론정치와 충돌해 많은 병폐를 남긴다. 도덕정치는 조선의 당쟁처럼, 극진보와 극보수, 극좌파와 극우파로 편을 갈라 싸우는 파당정치를 정당화한다. 진영 간 첨예한 대립과 적개심은 공적 논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다시 정책과 입법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민생정치를 외면하고 기득권을 대변하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국회와 정당이 당론이란 이름으로 이런 선악관을 받아들이면 의원들의 생각 차이와 의견의 다양성은 억압되어 창조적인 정책 생산을 멈추게 된다. 이분법적 선악관이 정당을 장악하면, 민주화된 지 30년이 넘어가는 변화된 상황은 무시되고 시대착오적 반일 대 친일,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라는 편 가르기로 쓸데없이 강경파와 도덕군자 행세를 하게 된다.

정의의 사도가 악당을 쳐부수는 권선징악 구도를 만드는 도덕정치는 대화와 타협, 협치라는 중도 수렴의 길을 막는다. 선악의 대립을 추구하는 도덕정치는 중도 수렴을 회색분자와 기회주의자로 배격하기에 공론정치에 부합하는 민생정치를 외면하게 한다. 미국 경제학자 존 듀카와 제이슨 세이빙은 진영정치가 소득불평등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와 보수가 지지층 결집을 위해 당파적 편향성을 강화하는 ‘전략적 극단주의’를 선택할 경우 정당 간 정책 차이 확대로 인해 소득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게 요지다.

 

극단정치 반복하면 ‘중도’가 양당 심판

왜 도덕정치는 민주정치의 다양성을 억압할까. 도덕정치는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인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 정치적 상대는 단지 청산되어야 할 악일 뿐이다. 도덕정치는 외부의 비판세력을 청산되어야 할 적으로 배척할 뿐만 아니라 내부의 의견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다.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대신에 같은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기 때문에 이른바 팬덤정치에 기초한 ‘포퓰리즘’에 취할 수밖에 없다.

대안은 무엇일까? 하나의 노선으로 공공성을 강조하는 ‘중도정치’(중도 수렴의 공론정치)를 검토할 수 있다. 중도주의 노선은 한국 정치사에 늘 있어왔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호남권과 충청권을 묶어내 승리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중도층 확보로 승리했다. 

안철수 현상의 촉발로 인해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중도 수렴 경쟁이 있었다. 중도 성향 안철수의 등장은 여야 후보들에게 중도 수렴을 강제했다.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선점해 승리했다. 문재인 후보도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창조적 성장론’, 안보와 남북 교류의 균형론으로 우클릭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MZ세대들은 중도 성향의 ‘스윙보터’로 성장해 오세훈 서울시장의 승리를 이끌었다.

2023년에도 여야 관계가 극단 대립을 반복한다면, 중도정치의 흐름은 다시 살아나 양당에 타격을 가할 것이다. 결국 여소야대의 국정운영을 정상화시키고 22대 총선 승리를 위해서라도 정치권은 집토끼를 어느 정도 결집한 후에 산토끼를 잡기 위해 중도로 외연을 확장해 무당파와 중도파의 지지를 얻는 중도 수렴의 정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안에서 단일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교조적 이념 틀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해답을 찾는 실용적 태도가 필요하다. 극단적 좌우 대립을 견제하고 균형을 통해 공공성을 잡기 위해서는 중도파가 우선 결집하고, 이후 양당이 중도파를 많이 공천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br>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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