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진양철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3가지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3.01.10 07:35
  • 호수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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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신드롬에 자서전 《호암자전》 ‘역주행’
극 중 내용과 비교 분석…재출간 담당자 “李 회장 솔직 고백에 요즘 독자들도 열광”

“나보다 순양을 더 잘 키울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겠다.” “3남 건희를 삼성의 계승자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신드롬이 종영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각종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에서 본방송 때 못지않게 인기를 끄는 한편 하이라이트와 분석 영상, 패러디물 등 파생 콘텐츠도 화제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모습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인기몰이 비결은 단연 진양철 순양그룹 회장 캐릭터다. 배우 이성민씨가 연기한 진양철 회장은 순양을 설립해 뛰어난 결단력과 승부 근성, 냉혹함으로 재계 1위 자리에 올린 기업가다. 드라마 속 단골 캐릭터지만 《재벌집 막내아들》은 실존 인물과의 ‘싱크로율’을 최대한 높이며 차별화에 성공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진양철 회장의 이력은 물론 성격과 외모, 말투도 이병철 회장을 꽤 닮아있다. 이 지점이 시청자들의 흥미와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포스터, 1월3일 서울 시내의 한 서점에서 방문객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살펴보고 있다. ⓒJTBC 제공·시사저널 최준필

“노름에 빠진 과거까지 적나라하게 기술”

《재벌집 막내아들》과 동명의 원작 웹소설이 진양철 회장을 그려내는 데 가장 많이 참고한 자료는 《호암자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호암자전》은 1986년 2월 발간된 이병철 회장의 유일한 자서전이다. 중앙일보에서 초판만 내고 절판했다가 28년여 만인 2014년 4월 나남출판이 삼성 측의 동의를 얻어 재출간했다. 이후 대중에게 꾸준히 읽히며 2022년 6월까지 8쇄를 찍어냈다. 그해 11월18일부터 방영된 《재벌집 막내아들》은 스테디셀러인 《호암자전》을 ‘역주행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방영 후 한 달여간(2022년 11월18일~12월15일) 교보문고에서는 《호암자전》 판매량이 직전 한 달(2022년 10월22일~11월17일)보다 7배 정도 급증했다. 지금도 경제·경영 분야 주간 판매 순위 30위권(2022년 12월28일~2023년 1월3일 기준 27위)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호암자전》 재출간 작업 전반을 맡았던 고승철 전 나남출판 사장은 시사저널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업적만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한때 노름에 탐닉하고 요정(料亭)을 숱하게 들락날락한 과거까지 고백할 정도로 솔직한 내용을 담았다”며 “이렇게 《호암자전》 자체의 가치가 큰 가운데 《재벌집 막내아들》 신드롬이 더해져 역주행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온라인상에선 “이 회장과 삼성에 관한 진짜 스토리가 궁금해 책을 샀다”는 누리꾼들 후기를 볼 수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과 《호암자전》, 진양철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얼마나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를까. 《호암자전》에 담긴 이 회장의 주요 언급을 중심으로 분석해 봤다.

 

승계·기업가 정신·인재관에서 차이 

<1>

 진양철  “내보다 순양을 더 잘 키울 아, 내 글마한테 경영권도 주고 물산 지분도 다 물려줄 기다.”

 이병철  “삼성 발전의 계기와 기틀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3남을 계승자로 정했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양철 회장은 자손 중에서 자기와 성향이 닮았거나 경영 능력을 스스로 입증하는 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 이병철 회장도 그랬다. 이 회장은 《호암자전》을 통해 ‘막내아들’ 이건희 삼성 2대 회장을 후계자로 정한 데 대해 “이 계승이 삼성의 확고부동한 새로운 발전의 계기와 기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3남 건희를 계승자로 정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창업보다 수성(守成)이 더 어렵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한 이병철 회장은 타계하기 11년 전인 1976년 9월 후계자를 지목했다. 하지만 진양철 회장은 막내손자 진도준(송중기 분)을 후계자로 세우려다 실패하고 사망한다. 

이 회장은 후계자 지목 후 10년여가 지나 출간된 《호암자전》에서 뒷얘기를 적나라하게 풀었다. 그는 “처음에는 주위의 권고가 있고 본인의 희망도 있어 장남 맹희(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2015년 8월 작고)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 봤다”며 “6개월도 채 못 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털어놨다. 

2남 고 이창희(1991년 7월 작고) 새한미디어 회장을 두고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했으므로 본인의 희망을 들어주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3남 건희는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 유학 후 귀국을 하고 보니 삼성의 전체 경영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음을 보고 경영 일선에 차츰 참여하게 됐다”면서 “본인의 취미와 의향이 기업 경영에 있어 열심히 참여해 공부하는 것이 보였다”고 평가했다. 후계자 선정 당시 재계 안팎에선 ‘이병철 회장 슬하 3형제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막내아들’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2>

 진양철  “나는 장사꾼이다. 돈을 잃었으면 유죄, 돈 벌믄 무죄, 그뿐이라!” 

 이병철  “기업가를 단지 돈벌이의 관점에서만 보는 사고방식으로는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진양철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모두 이재(理財)에 밝고 철두철미했다. 순양과 삼성이 설립 이후 ‘돈 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급속히 성장한 배경이다. 그러나 돈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었고, 이런 물질만능주의적 사고를 숨기지 않고 표현한 진양철 회장과 달리 이병철 회장은 자신을 장사꾼 내지 돈벌이주의자로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호암자전》에서 이 회장이 서운함을 토로하는 상대는 딱 하나, 바로 사회의 시선이다. 

이 회장은 36세 때인 1945년 8·15 해방 직후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을 다진 것을 회상하며 “이와 같은 각성은 그 후 기업을 일으키고 경영하는 데 있어 일관된 나의 기업관이 되어 왔다. 사회일반의 이해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때로는 돈벌이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사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950년대 말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호황을 누리며 ‘한국 최초의 재벌’로 불리던 시절을 두곤 “당시 재벌에 대한 (세간의) 이해가 부족했다. 언젠가는 기업에 쏟는 의도를 반드시 이해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혼자 다짐하곤 했다”고 전했다. 

인생의 마지막 무렵에도 이 회장은 “수많은 사람과 자금, 자재를 동원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 공급하고 국민에게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하며, 나라의 재정을 뒷받침하고 사회의 생활환경과 문화시설을 끊임없이 개선시켜주는 기업이나 그것을 이끌어가는 기업가를 단지 돈벌이의 관점에서만 보는 사고방식으로는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고 재차 주장했다. 

1978년 8월25일 열린 삼성그룹 해외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이병철 창업회장이 당시 36세였던 3남 이건희 삼성물산 부회장을 배석시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호암자전》 수록 사진
1978년 8월25일 열린 삼성그룹 해외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이병철 창업회장이 36세의 3남 이건희 2대 회장(당시 삼성물산 부회장)을 배석시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호암자전》 수록 사진

<3>

 진양철  “(나는) 요 가슴팍 아래로 심보가 세 개나 더 있다. 여는 돈 욕심, 여는 부리는 사람 믿지 않는 의심, 요 아래는 언제든 그게 누구라캐도 배신할 수 있는 변심.” 

 이병철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나는 인재에게 모든 것을 맡겨왔다.” 

진양철 회장처럼 이병철 회장도 자신이 일군 세상에서 절대 권력자였다. 삼성 임직원이든 가족이든 이 회장을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용인술(用人術)로 두 인물을 비교하면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진양철 회장은 수족과 같은 이항재 비서실장 외에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죽하면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의리가 없는 것을 자랑처럼 떠벌린다. 반면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찾고, 그들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이 회장은 1938년 3월 대구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설립한 뒤 어음 발행이나 인감의 관리 등 경영 실무 전반을 지배인에게 맡겼다.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라는 인사 철학이 정립된 시기다. 그는 “삼성상회의 출발과 함께 터득하고 실천했던 이 사람 쓰는 원칙은 그 후 일관되게 내 경영 철학의 굵은 기둥 중 하나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사업을 막 본격적으로 시작한 20대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일구고 타계한 70대까지 이 회장은 신뢰와 권한 위임에 기반한 ‘책임경영제’를 줄곧 유지했다. 그는 “삼성이라는 기업그룹의 창업 이념과 그에 근거한 기업 경영의 원칙, 이것을 이어갈 인재의 발굴만을 내가 맡았다. 경상적인 사업의 사소한 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고 고백했다. 

과거 삼성 임직원 필독서였지만… 

고승철 전 사장은 “배우 이성민씨가 이병철 회장을 치열하게 연구해 표정, 카리스마, 사투리 등을 잘 표현했던데, 사실 이 회장이 그렇게 과격하진 않았다”며 “이 회장은 점잖고 말도 조용조용히 독백식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성공에 필요한 세 가지 요체로 꼽은 ‘운둔근(運鈍根·우둔하면서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운이 온다)’은 그의 평소 태도 그대로였다. 

한편 《호암자전》은 1986년 초판 발간  후 한동안 삼성그룹사 임직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승진하려면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 했던 기간도 있었다. 삼성전자의 한 간부급 직원은 “지금은 그런(독후감 제출) 제도가 없고 심지어 이병철 회장이 창업자인지 모르는 젊은 직원도 있다”며 “2대 이건희 회장 별세 이후론 삼성 내에서 오너십이나 기업가 정신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책임경영, 인재 제일주의 등 회사 고유의 색깔도 크게 옅어진 듯하다”고 했다. 

서울 을지로 삼성빌딩 지하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 칸티나(La Cantina)’ 모습과, 이곳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즐겨 먹었다는 봉골레 파스타 ⓒ시사저널 오종탁

■ 이병철 회장의 단골 식당 ‘라 칸티나’ 여전히 성황 

“메뉴판에 없는 ‘삼성 메뉴’가 제일 잘 나갑니다.” 

1월4일 오후 서울 을지로 삼성빌딩 지하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 칸티나(La Cantina)’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앞서 오픈 시간인 오전 11시30분에 맞춰 갔다가 “예약자가 아니라면 당장 입장이 힘듭니다”라는 안내를 받고 1시간을 기다려 겨우 자리에 앉았다. 

점원에게 조심스레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먹던 메뉴로 부탁한다”고 말했더니 “아, 삼성 메뉴요”라며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주문을 받는다. 마늘빵과 양파 수프, 봉골레 파스타, 샐러드, 스테이크, 디저트 과일, 커피 또는 홍차로 구성된 삼성 메뉴(5만원)는 이 집의 히든카드다. 메뉴판에 따로 표기해 두지 않았음에도 주문량은 늘 상위권이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인기를 끌고 나서 삼성 메뉴는 더욱 불티 나게 팔리고 있다. 가게에 따르면 최근 방문하는 손님의 80% 이상이 삼성 메뉴를 찾는다. 

2대째 라 칸티나를 운영하고 있는 이태훈 대표(58)는 “삼성 메뉴가 요즘 제일 많이 나가고 있는데, 드라마(《재벌집 막내아들》)의 인기에 힘입은 것인지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단골에 드라마 보고 찾아온 손님까지 너도나도 삼성 메뉴를 찾으면서 라 칸티나는 다시 ‘이병철 회장의 식당’으로 통하고 있다. 

라 칸티나는 56년 전인 1967년 문을 열었다. 이병철 회장은 1976년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이 준공되기 전까지 삼성빌딩 6층에서 집무하며 자주 라 칸티나를 찾았다. 태평로로 집무실을 옮긴 뒤에도 배달시켜 먹을 정도로 라 칸티나 음식을 좋아했다. 다만 생전에 늘 소식했던 이 회장이 실제로 삼성 메뉴를 즐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회장의 제안으로 삼성 임직원이 자주 먹게 된 메뉴라는 설도 있다. 

이 대표는 “나는 이병철 회장을 손님으로 맞아보지 못한 세대다. 워낙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여러 가지 스토리의 진위를 확인할 길도 없다”면서도 “40년 넘게 우리 가게 주방을 지켜온 셰프들에게 물어보면 이 회장이 삼성 메뉴를 즐겨 먹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소식가인 이 회장은 삼성 메뉴 중에서 봉골레 파스타의 국물과 조갯살만 먹었다”며 “오히려 이 회장의 넷째 사위인 고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이 생전에 거의 매일같이 이곳에서 삼성 메뉴와 비슷한 구성으로 식사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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