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국정원이 대북 창구로 전락 “방첩기관 본연의 임무 수행해야”
  • 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03 10:05
  • 호수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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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MI6와 MI5, 미국 CIA와 FBI, 이스라엘 모사드와 신베트, 러시아 SVR과 FSB처럼 대내-해외 업무 분할 필요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 6월14일 평양 목란각에서의 만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고급 와인을 곁들인 코스요리를 즐기고 좌석 곳곳은 건배 소리와 대화로 시끌벅적했다.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를 즈음 헤드테이블에 있던 김정일이 “국정원장 이리 와보시오”라며 임동원 당시 원장을 불렀다. 임 원장에게 귀엣말로 김정일이 속삭이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대화 내용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지만 그 자체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여론이 들끓었다. 간첩 잡는 대북 정보기관의 수장이 방첩 대상의 ‘수괴’ 격인 인물에게 불려가 밀담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측면에서다.

임동원(왼쪽부터)·서훈·박지원 전 국정원장 ⓒ시사저널 임준선·박은숙·이종현
임동원(왼쪽부터)·서훈·박지원 전 국정원장 ⓒ시사저널 임준선·박은숙·이종현

정보기관 수장이 간첩 수사 훼방 놓고 탈북자 강제북송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은 국정원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담 6개월 전 통일부 장관에서 국정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임동원은 김대중의 대북밀사로 판문점을 극비리에 넘나들며 평양을 오갔다.

회담이 임박한 6월3일 방북 때 임 원장을 수행한 인물이 서훈 당시 국정원 연락관이다. 앞서 4월 싱가포르와 베이징에서 북한의 송호경 아태 부부장과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이끌어낸 건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다. 물론 그 뒤엔 국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회담 막후 주역을 맡은 임동원-서훈-박지원 세 사람이 모두 국정원장 자리를 거쳤다는 건 대북 정보기관의 위상이나 역할과 관련해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진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정원의 역할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탈북 어민 강제북송과 북한 표류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의 ‘월북 조작’ 의혹으로 문재인 정부 때 국정원장 등이 영어의 몸이 되고 정보기관 책임론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새해 들어 본격화된 간첩단 사건 조사 과정에서 이전 정부 국정원이 수사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원장이 수사를 미루도록 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배경에는 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 막후 역할을 해온 서훈 전 원장 등이 남북관계와 회담 성과 등을 위해 간첩 사건은 물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껄끄러워 할 대북 사안을 덮어버리거나 축소하려 했을 것이란 판단이 깔려 있다.

국가 정보기관이 대북 접촉의 전면에 나서는 건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물꼬를 트던 시기부터 관행으로 굳어진 측면이 있다. 냉전 시기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립 상황에서 대북 정보 당국과 베테랑 요원들이 전반적인 상황을 조율하고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통일부 등 대북 업무를 전담할 정부 부처가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기 어려운 측면도 고려됐다. 그러다 보니 무리수가 동원되기도 했다.

국정원이 대북 관련 사안에서 가장 치욕적인 상황을 맞았던 건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에 건넨 4억5000만 달러의 비밀송금 때 창구 역할을 맡은 부분이다. 정권과 정보기관의 수장이 국정원을 불법 환전상 노릇을 하게 하고 직원들을 여기에 동원한 것이다. 의혹 제기에 대해 국정원은 보도자료까지 내 “전혀 근거 없다. 국정원이 북측에 돈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고, 북한도 여기에 맞춰 발뺌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나선 대북 송금 특검에서 정상회담과의 관련성과 위법성이 드러났고 관련자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남북관계 성과 위한 잇단 무리수로 논란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남북 간 접촉과 교류에서 정부 당국뿐 아니라 민간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굳이 국정원이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대북 협상과 교류·협력 사업의 추진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얘기다. 사실 정보기관의 최고책임자가 대북밀사나 막후 접촉의 주역을 맡게 될 경우 압박이나 부담은 가중된다. 남북 정상 간 교감을 책임진다는 점에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이어가며 성과를 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북측 인사나 최고지도자와의 친분을 과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임동원의 입장에서 김정일과 귀엣말을 나눌 정도의 ‘친분’을 보여주는 건 자신에게 밀사 역할을 부여한 대통령에게 신임을 축적하는 가장 믿을 만한 방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북한 대남 관계자나 최고지도자가 자신을 믿을 만한 중개인으로 여기도록 환심을 사야 하는 국정원장 입장에서는 본연의 대북 정보나 방첩 임무는 잠시 밀쳐둬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국정원 안팎에서는 국가 정보기관의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하는 게 급선무란 목소리가 나온다. 무엇보다 북한의 대남 공작과 첩보활동을 차단하기 위한 방첩 업무에 생긴 균열을 보수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정원 내부에서 암약하는 북한 동조세력이나 불순세력이 없는지 꼼꼼히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한다. 국가 안보에 가장 치명적인 건 정보기관에 침투한 스파이란 얘기다.

대표적인 건 동독에 대해 전향적 정책을 추진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최측근 비서인 귄터 기욤 사건이다. 동독 첩보기관 슈타지의 요원인 기욤은 1956년 서독에 침투해 장기간 고정간첩 활동을 벌이다 1973년 브란트 총리의 비서관이 됐고, 동독 정보국과의 암호통신으로 기밀을 빼돌렸다.

케임브리지대 출신 엘리트 청년들이 10년 넘게 소련 KGB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케임브리지 5인방’ 사건도 교훈을 준다. 특히 일당 중 킴 필비는 영국 해외정보국 MI6의 소련·동유럽 담당 총책으로 MI6 최고책임자 후보까지 올랐다. 미국 CIA의 도움으로 발각됐지만 영국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추락했다.

국정원 출신 인사나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참에 국정원이 대북 정보와 방첩 업무에만 전념토록 하고 남북대화의 막후 접촉 등 역할은 통일부와 다른 기관에 넘기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대간첩 임무나 방첩 부문을 별도로 분리해 별개의 전담 기관을 만드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영국의 MI6와 MI5, 미국 CIA와 FBI, 이스라엘 모사드와 신베트, 러시아 SVR과 FSB처럼 대내와 해외 업무를 나누자는 제안이다. 국정원과 경찰, 군 수사기관 등 여러 곳으로 분산된 방첩조직을 망라하는 새로운 조직에 맡겨 대공수사권 논란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북한의 전통적인 대남 비난 레퍼토리는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국정원 해체 등 3가지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국정원 해체 주장이 빠졌다. 북한 입장에선 어쩌면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아도 사실상 형해화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국정원이 위상이나 실질적인 역할 면에서 바로 서기를 한다면 북한의 대남 선전매체에서 다시 ‘국정원 해체’ 요구가 들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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