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영웅’ 계보 잇는다…이정후에 쏠린 눈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04 13:05
  • 호수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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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 빠진 한국 야구 반등 위해 국제대회 선전 필요한 시점
2006년 박찬호·이승엽, 2009년 봉중근·김현수, 2023년은 이정후?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한국 야구에도 중요한 대회다. 위기론이 팽배한 가운데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국 등은 WBC가 일반 관중을 야구장으로 다시 끌어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여자배구가 2020 도쿄올림픽 4강이란 성과 덕에 팬층을 확대했고, 2월25~26일 개막한 프로축구 K리그가 지난해 카타르월드컵 16강 쾌거를 발판 삼아 개막 6경기에서 관중 10만 명이 넘는 흥행 대박을 터뜨린 것만 봐도 그렇다.

2월24일(현지시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열린 WBC 2023 대한민국 대표팀과 KT위즈의 평가전에서 대표팀 이정후가 타격하고 있다. ⓒ연합뉴스

메이저리그 관계자들도 이정후에 큰 관심

야구장 열기 또한 WBC 대회가 불을 지폈다. 박찬호·김병현·서재응 등 메이저리거가 대거 참가한 2006년 첫 대회에서 4강에 오르며 주춤하던 인기를 반등시킬 기회를 잡았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2009 WBC 준우승이 연거푸 이어지며 당시 KBO리그 인기는 그야말로 활활 타올랐다. 2008년 사상 처음 시즌 500만 관중을 넘은 뒤 2011년 600만 관중, 2012년 700만 관중 시대를 열어젖혔다. 2016~18년 3년간은 800만 관중 이상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았다.

하지만 2013년에 이어 2017년 WBC에서도 한국 대표팀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며 KBO리그는 성장동력을 잃었다. 프로 스포츠의 인기를 견인하는 것은 스타인데, 새로운 스타 발굴이 전혀 되지 않았다. 2008년, 2009년 활약했던 김광현(SSG 랜더스), 김현수(LG 트윈스), 이대호(은퇴) 등이 여전히 대중적 관심도 1위였다. 차세대 스타 기근이 이어지면서 신규 팬층을 끌어모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야구 관계자들이 국제대회 성적을 강조하는 이유다.

2006 WBC 때는 당시 빅리거였던 박찬호를 비롯해 일본에서 활약하던 이승엽, 그리고 ‘캡틴’ 이종범이 맹활약했다. 당시 박찬호는 4경기에 등판해 10이닝 7피안타 8탈삼진 무실점의 투구를 보여줬고, 이승엽은 7경기 타율 0.333(24타수 8안타) 5홈런 10타점의 화력을 뽐냈다. 특히 도쿄돔에서 열린 아시아 라운드 일본전에서 1대2로 뒤진 8회초 1사 때 터뜨린 우중월 역전 투런포로 ‘도쿄 대첩’을 완성했다.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이종범은 미국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열린 2라운드 마지막 3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0대0으로 맞선 8회초 1사 1·3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터뜨렸다. ‘8회의 기적’은 지금도 WBC 하면 회자된다. 박찬호, 이승엽, 이종범은 대회 올스타에도 뽑혔다. 

2009 WBC 때 영웅은 봉중근·김태균·김현수·이범호 등이었다. 빅리거로는 추신수가 유일하게 참가한 가운데 KBO리그 선수들이 제 몫을 다했다. 봉중근은 4경기(3경기 선발)에서 17⅔이닝 동안 투구하면서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51로 활약했다. 특히 일본전에서 인상적인 투구(5⅓이닝 무실점)를 보여주면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와 이름이 같은 것에서 차용돼 ‘봉의사’로 불렸다. 김태균은 9경기에서 3홈런(11타점)을 터뜨렸고, 김현수는 4할에 가까운 0.393(28타수 11안타)의 타율을 뽐냈다. 이범호 또한 타율 0.400(20타수 8안타) 3홈런 7타점으로 준우승의 밑돌을 놨다. 봉중근·김태균·김현수·이범호는 대회 직후 포지션별로 최고를 뽑는 베스트12에 선정됐다. 

이랬던 2006년, 2009년 대회 때의 영광은 2013년, 2017년 대회의 충격적인 1라운드 탈락으로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선수들의 활약도 점점 잊혀졌다. 국제 경쟁력도 없으면서 국내 리그에서 연봉만 많이 받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의 터널을 지나 6년 만에 재개되는 2023 WBC 대회다. 

대회 개막(3월8일)에 앞서 이슈 몰이를 하는 스타 플레이어는 이정후(키움 히어로즈)다. 이정후가 이번 시즌 이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상태라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관심이 많다. 대표팀 캠프가 차려진 미국 애리조나 투손에는 AJ 프렐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단장 등 메이저리그 관계자가 대거 몰려와 이정후를 지켜보기도 했다. ‘MLB닷컴’은 ‘2023 WBC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으면서 외야수 부문에 이정후를 미국 대표팀의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 무키 베츠(LA 다저스)와 함께 선정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2월18일(현지시간) WBC 대표팀의 이정후가 미국 애리조나주 전지훈련장에서 김민재 코치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WBC 첫 출전…“도쿄올림픽 부진은 잊었다”

미국 캠프 당시 이정후의 방망이는 쉼 없이 돌아갔다. 강백호·박병호(이상 KT 위즈)와 함께 아침 일찍 대표팀 훈련장을 찾아 훈련했고, 휴식일에도 똑같이 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바꾼 타격폼에 익숙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했다. 이정후는 먼저 빅리그에 진출한 팀 선배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조언에 따라 평균 구속 155km 안팎에 이르는 메이저리그 강속구 투수를 상대하기 위해 타격 폼을 간결하게 바꿨다. 타격 폼 개조는 지난 시즌 리그 타격 5관왕의 위험한 모험일 수도 있지만 이정후는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바꿔나갔다.

이정후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보다 수치가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부문) 1위가 안 될 수도 있다. 타이틀은 운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늘 지난해보다 하나씩 더 나아지는 것을 목표로 해왔고 지금껏 그래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대표팀 관계자에 따르면 이정후는 현재 새 타격 폼과 기존 타격 폼의 접점을 찾으면서 적응을 거의 마친 상태다. WBC 본선에서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는 지켜봐야만 안다. 다만, 그를 개인 지도한 최원제 타격코치도, 한때 히어로즈에서 이정후를 지도했던 심재학 대표팀 퀄리티 컨트롤(QC) 코치도 이정후의 성공을 자신한다. 그만큼 이정후가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정후에게는 이번이 첫 WBC 출전이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는 6경기에서 타율 0.417(24타수 10안타) 2홈런 7타점으로 맹활약했고, 2019년 프리미어12 때도 타율 0.385(26타수 10안타) 5볼넷 4타점으로 한국의 올림픽 본선 진출을 도왔다. 2020 도쿄올림픽 본선 때는 다소 실망스러운 활약(타율 0.241)을 했지만 스스로는 “도쿄올림픽은 잊었다. 온힘을 다해 WBC에서 이겨 보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친인 이종범 LG 트윈스 코치가 WBC 첫 출전에서 올스타에 뽑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정후의 활약 또한 기대된다. 지금껏 이정후는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따라 타격왕도 했고,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상(MVP)도 받았다. 모두 세계 야구 최초로 부자가 일궈낸 일이었다. 

이정후는 KBO리그에서 전국구 인기를 누리는 선수다. 이에 대해 그는 “인기 구단은 안티도 많다. 히어로즈에 있기 때문에 10개 구단 팬들이 다 좋아해 주는 것”이라면서 “나에겐 지금의 인기도 과분하다.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낮춰도 그가 지금 KBO리그 최고 인기 선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KBO리그 통산 타율(3000타석 이상) 1위(0.342)에 올라있는 이정후. 그의 방망이가 쌩쌩 돌아가면 WBC 대표팀 성적도 쑥쑥 오를 것이다. 그리고, 벼랑 끝에 서있는 KBO리그 또한 방긋 미소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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