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탈》,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픽사가 아니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10 11:05
  • 호수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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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발상과 그렇지 못한 서사
픽사의 《엘리멘탈》이 아쉬운 이유

‘6500만 년 전 공룡을 멸종시킨 운석이 지구를 피해 갔다면?’이라는 기발한 발상으로 공룡과 야생 인간의 우정을 그려냈던 《굿 다이노》의 피터 손 감독이 《엘리멘탈》에 착륙해 세상을 이루는 4대 원소인 ‘물’ ‘불’ ‘흙’ ‘바람’이 모여 사는 도시를 시각화했다. ‘인간의 감정’을 의인화하고(《인사이드 아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영혼’을 이미지화하고(《소울》), 폐기물 수거 로봇 심장에 두근거리는 하트를 박았던(《월-E》) 픽사가 이번엔 원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 중 영화가 각별하게 주목하는 건 물과 불이다. 피터 손은 ‘상극’이라 여겨지는 두 원소가 ‘상생’하는 길을 모색한다.

영화 《엘리멘탈》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물과 불이 사랑에 빠진다면?

본편 상영에 앞서 자사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상영해온 픽사가 이번에 선보인 단편은 《업》(2009)의 스핀오프인 《칼의 데이트》다. 우연일까. ‘파이어 랜드’ 출신 버니와 선더 부부가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딸인 앰버(레아 루이스)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시간이 압축돼 그려지는 《엘리멘탈》의 도입부는, (칼이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부터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는 수십 년을 파노라마로 요약한) 《업》의 오프닝과 닮았다. 차이라면 《업》이 홀로 남은 주인공 칼의 ‘상황’을 소개하는 측면이 크다면, 《엘리멘탈》은 한 가족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속한 엘리멘트 시티의 세계관을 응축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실제로 도입부를 통해 관객은 엘리멘트 시티가 이민자들의 도시이고, ‘물’ 종족이 터줏대감처럼 이곳을 미리 선점하고 있으며, 수로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는 이 도시에서 ‘불’들은 그들만의 구역에 모여 커뮤니티를 형성해 살아가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여기엔 뉴욕으로 이민 온 부모님 아래서 자란 한국계 미국 감독 피터 손의 경험이 녹아있다. 앰버가 마주하는 고민은 피터 손을 비롯한 이민 2세들이 자라면서 느낀 감정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앰버는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

앰버는 자신을 키우기 위해 희생한 부모님에게 보답하고 싶어 한다. 아니, 보답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부모님의 식료품점을 물려받아 가업을 잇고자 애쓴다. 그래야 부모님이 마음 놓고 은퇴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다른 꿈을 꿔본 적이 없다. 부모의 길을 따르는 것을 ‘디폴트값’으로 여긴다.

앰버의 계획은 그러나 ‘물의 남자’ 웨이드(마무두 아티)를 만나면서 흔들린다. 시청 공무원 웨이드가 누수를 점검하다 앰버네 가게 수도관으로 빨려 들어온 건 우연일까, 인연일까. 우연인 줄 알았던 만남은 점점 인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웨이드를 만나면서, 불같은 성격의 앰버는 처음으로 다른 종류의 열감이 심장을 집어삼키는 것을 느낀다. 웨이드 역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충만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그렇다. 사랑,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는 웨이드를 통해 앰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부모님의 가게 밖에 있을지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한 만큼만

《엘리멘탈》은 가족이 함께 즐길 만한 애니메이션이다. 이민자 사회에 대한 다각적인 은유와 더불어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자세가 극 전반에 녹아있다. 물 날벼락을 피하기 위해 고안한 불 종족의 생활습관이나, 물 종족이 만들어내는 파도 타기 응원처럼 아기자기한 아이디어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플라토닉 사랑을 넘어선 금단의 사랑을 시각적으로 그려낸 물과 불의 화학적 결합(케미스트리)이 빼어나다.

문제는 서사다. 이 영화의 서사는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한 만큼만 보여준다. 가령 앰버와 웨이드의 러브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변형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애니메이션으로 바꾼 느낌이 강하다. “불과 물은 섞일 수 없다”며 딸의 사랑에 노발대발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낯익지 않나? 추억 속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디즈니의 최근 작품 《인어공주》에서 인간과 사랑에 빠진 인어 딸에게 아버지가 보인 반응과 같다(알다시피 픽사와 디즈니는 한 지붕 한 가족이다).

서사뿐 아니라, 디테일도 다소 관습적이다. 엘리멘트 시티 출신임에도 다른 생김새 때문에 “우리 말을 잘한다”는 말을 듣는 앰버의 모습이 대표적. 이민자를 향한 이러한 편견은 이미 여러 영화에서 다뤄진 장면이라 《엘리멘탈》의 개성에 힘을 보태지 못한다.

이민 2세의 고민과 문화 간 갈등을 풀어나간 부분의 아쉬움은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성난 사람들》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이민 2세대의 현실을 풍자한 《성난 사람들》이 높이 평가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민자 사회를 그리면서도 기존 문법에 기대지 않고 그들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멘탈》은 《성난 사람들》이 새롭게 비틀어놓은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다시금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디아스포라를 녹여낸 게 빤하다는 게 아니라,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픽사라는 이름의 기대치를 생각했을 때 참신하지 못하단 이야기다.

이 영화엔 픽사만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명제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 새로운 의제를 설정해 주고 창의적인 서사와 그만의 감수성으로 뭉클함을 선사했던 픽사 아닌가. 그런 픽사가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이(흔하게) 다뤄지는 ‘각자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 잘 지내보자’는 제안을, 관습적인 서사로 풀어냈다는 점에 실망감이 슬쩍 고개를 든다. 여러모로 《엘리멘탈》은 21세기 기술력으로 풀어낸 20세기 이야기처럼 보인다.

영화 《엘리멘탈》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21세기 기술력으로 풀어낸 20세기 이야기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대다수 대중이 만족할 만큼 매력적인가에도 의문이 남는다. 나는 마지막까지 주인공 앰버와 웨이드에게 빠지지 못했는데, 그들 각자의 퍼스널리티가 너무 쉽게 읽혀서일까.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불꽃은 아름다웠지만, 캐릭터는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지 않다. 물과 불에 힘을 준 것과 비교해, 또 다른 원소인 흙과 바람이 부실하게 그려진 것 역시 넋두리하고 싶은 부분. 원소들이 사는 도시라는 솔깃한 설정으로 출발하는 영화는 가지고 있는 카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디즈니의 픽사 인수 후, ‘두 회사 정체성이 모호해져 버렸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던 시기가 한동안 있었는데 이젠 그 시기마저 지나서 ‘그러려니’ 여겨지는 시점으로 굳어진 것 같다. ‘픽사스러운 디즈니 작품’이 나오고 ‘디즈니 같은 픽사 작품’이 나오면서 이들 작품의 평가 기준이 ‘픽사와 디즈니의 장점이 얼마나 잘 배합됐는가’로 옮겨간 분위기인데, 그랬을 때 《엘리멘탈》은 그 장점에 제대로 섞이지 못한 ‘디즈니적인 픽사 영화’에 가깝다. 픽사 작품이라는 것 자체가 흥행과 작품성을 100% 보증할 때가 있었음을 떠올렸을 때, 이젠 많이 멀리 온 기분. 그래서 조금 서글픈 기분이다.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픽사 속 한국 창작자들

피터 손은 디즈니-픽사 최초의 아시아 감독이다. 《엘리멘탈》엔 피터 손 외에도 다수의 한국인 스태프가 제작에 참여했다. 이채연 3D 애니메이터, 전성욱 레이아웃 아티스트, 김혜숙 애니메이터, 아놀드 문 크라우드 테크 리드가 그들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총체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애니메이터가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 분업한다.

《엘리멘탈》의 경우 이민자의 서사가 중심적으로 다뤄진 만큼, 이들 스태프의 경험이 작품 전반에 녹아들었다. 한편 피터 손은 전작 《굿 다이노》에서도 한국인 애니메이터와 작업한 바 있다. 《인사이드 아웃》 《라따뚜이》 《업》 《토이 스토리3》 등에서 활약한 김재형 애니메이터로, 그는 2021년 《소울》 작업에도 참여했다. 《엘리멘탈》 개봉과 함께 한국을 찾았던 이채연 애니메이터에 따르면 픽사에는 한국인 20여 명이 근무한다. 이채연 애니메이터가 꼽은 한국인 애니메이터의 최고 강점은 ‘꼼꼼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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