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내 마음 같은 바로 그 여행, 《박하경 여행기》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19 13:05
  • 호수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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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영화
어쩌면 우리가 기다려온, 소박하고 무해한 처방전

그런 순간이 있다. 그동안 분명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알 수 없을 때. 잠시 못 본 척했더니 어느덧 태산처럼 쌓여 있는 일상의 문제들과 여전히 어렵기만 한 인간관계, 애꿎게 연차만 늘어날 뿐 답 안 나오는 커리어, 숫자가 채워지기는커녕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만 하는 통장이 나를 슬프게 할 때. 어쩌자고 이 모든 난제는 언제나 한꺼번에 죽기 살기로 내게 달려드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 그런데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바로 그때가 또 다른 무게와 스트레스의 시작이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일정 조율은 어떻게 해? 비용은? 다녀오면 여독까지 얹혀서 더 피곤할 텐데? 생각만으로도 이미 지치는 기분이다. 그리고 다시 꾸역꾸역, 하릴없이 지난한 일상으로의 복귀. 고난도 이런 고난이 없다. 웨이브 오리지널 8부작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는 이토록 지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먹고, 걷고, 일상을 잠시 잊는 것으로 충분한 여행. 주인공 박하경(이나영)을 통해 얻는 대리만족은 독기 가득한 세상에 소박하고 무해한 처방전이 된다.

ⓒWavve 제공

겉멋을 걷어낸 진짜 여행

제목에 ‘여행기’라는 단어가 붙었지만 실상은 장거리 하루 외출에 좀 더 가깝다. 긴 휴식은 엄두도 낼 수 없고 그렇다고 하던 일을 모두 집어치울 수도 없을 때. 주말 중에서도 토요일, 하루짜리 일탈을 왜 굳이 감행하는지 묻는 질문에 답하는 박하경의 한마디는 일상의 시계추에 피로하게 붙들린 시청자들의 마음 안으로 곧장 파고든다. “아무 데도 안 가면 못 견딜 것 같고, 동시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인 박하경은 매회 오프닝마다 ‘사라져버리고 싶은 순간’을 만난다. 책상에 엎드리지 않고 수업을 듣는 학생이 손에 꼽히는 교실의 교탁 앞에 서있을 때, 하필이면 그때 운동장에서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가 지금의 나보다 자유로워 보일 때, 학교 측의 강경함과 학부모들의 등쌀, 학생들의 애원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일과만으로 분주한 어느 날 연로한 부모님이 인터넷 연결 문제로 전화를 걸어와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실 때. 박하경은 치솟는 스트레스를 뚫고 잠시 사라지기로 마음먹는다.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매회 반복되는 박하경의 내레이션은 새로운 여행에 앞서는 주문이다. 땅끝마을 해남,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인 부산, 속초, 대전, 제주, 경주가 박하경이 택한 여행지다. 때론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가 선택되기도 한다. 제주의 유명한 빵집들을 하루에 돌아보는 ‘빵집순례’처럼 철저히 계획하는 하루도 있지만, 박하경의 여행은 대부분 즉흥적인 선택과 우연에 자신을 맡겨보는 방식이다. 5화의 배경인 대전은 애초에 정했던 목적지도 아니다. 예매해둔 기차는 놓쳤고, 가장 빨리 출발하는 것을 잡아타 꾸벅꾸벅 졸다가 충동적으로 내린 도시다.

홀로 부지런히 걷고 현지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 거의 전부인 여행이지만, 늘 누군가를 잠시 만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해남의 한 절에서 수행 중인 불자들, 자기만의 예술관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옛 제자, 약간의 설렘으로 얽히는 남자, 세대관이 맞지 않아 뜻밖의 언성을 높이며 말을 섞게 되는 노인, 어릴 적 좋아했던 만화 작가 등등. 하경은 여행길에서 마주친 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자신만의 작은 쉼표를 만든다.

중요한 건, 박하경의 여정은 애꿎게 여행의 판타지만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짧은 여행은 박하경의 지난한 일상을 구원하지 않는다. 인생의 가치관을 뒤흔들 만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박하경 여행기》는 겉멋을 전부 걷어낸 ‘진짜 속성’을 안다. 하루 일과를 벗어나 조금은 다른 공기를 가르는 기분으로 진입해 보는 시공간에서 멋쩍음과 두려움을 비집고 나오는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일. 그 자극을 위해서는 약간의 씁쓸함이 필연적으로 동반돼야 한다는 것. 《박하경 여행기》가 말하는 여행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의 한 장면 ⓒWavve 제공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의 한 장면 ⓒWavve 제공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의 한 장면 ⓒWavve 제공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의 한 장면 ⓒWavve 제공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의 한 장면 ⓒWavve 제공
웨이브 《박하경 여행기》의 한 장면 ⓒWavve 제공

간결하고 담백한 시리즈의 미덕

담백함은 이 시리즈 최고의 매력이다. 매사에 쭈뼛거리고 소극적인 주인공의 성향을 닮아 요란하지 않을뿐더러 내성적이기까지 한 여덟 번의 여정은, 비단 박하경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과 닮아있다. 1화에서 해남의 한 절을 찾았던 박하경은 산을 오르는 길목에 쌓인 돌탑을 보고 속으로 생각한다. ‘발로 차버리고 싶다.’ 마음 수련의 시간에 속으로 숫자 열을 세는 것마저 집중할 수 없던 박하경은 차라리 숲속 헤매기를 택한다. 그러다 묵언수행을 하던 불자를 만나 함께 걷다 마주한 탁 트인 절경. 차버리고 싶던 돌탑 위에 자신만의 돌을 하나 얹게 되는 정도가 박하경이 겪는 변화의 전부다.

러닝타임도 부담 없다. 대부분 24분, 가장 긴 에피소드인 2화는 28분에 불과하다.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시리즈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소박하고 가벼운 《박하경 여행기》는 숏폼 시리즈 본연의 매력을 훌륭하게 상기시킨다. 이 작품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을 연출했던 이종필 감독과 각본을 썼던 손미 작가가 재회하며 탄생했다. 거대한 배경 없이도 이야기의 맛을 살려낼 줄 아는 창작자들의 재능이 다시 한번 통했다. 매회 한예리, 구교환, 박인환, 심은경 등 다양한 배우가 여행지에서 박하경이 만난 사람으로 분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오랜 계획보다는 순간의 선택으로 빚어진 우연성과 작은 요행들에 기대는 하루. 일상에서 온전히 발을 떼지 않은 채 조금 넓혀보는 박하경의 반경은 가장 나답지만 동시에 가장 멀게 느껴졌던 자기 안의 존재를 마주하는 여정의 배경이 된다. 긴 도피 대신 잠깐 웅크리고만 싶은 사람,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포기라는 선택지가 아예 없는 사람, 사소하게 좋아하는 것을 위해 온전히 시간을 써보고 싶은 사람, 정지된 과거와 막연한 미래를 응시하는 대신 현재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 그 모두가 《박하경 여행기》라는 무대의 주인공이다. 보는 이들이 저마다 ‘내 이야기’라고 느낄 만한 발견의 순간들이 반드시 한 번쯤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기다려왔다.

박하경 그 자체가 된 이나영

tvN 《로맨스는 별책부록》(2019) 이후 4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이나영은 그간의 공백이 무색하리만큼 박하경에 맞춤옷 같은 모습을 선보인다. 발랄한 단발머리, 해사한 표정의 그는 ‘그림’만으로 주목의 힘이 생기는 배우다. 독보적 이미지가 있다는 건 일종의 재능이다. 연기의 패턴이 전형적으로 읽히는 배우도 아니라서, 매회 새롭게 등장하는 배우들과 마주할 때 리액션이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예상치 못한 엉뚱함부터 환한 미소, 수줍다가도 때론 뜻밖의 용기를 내는 그 모든 순간의 박하경은 온전히 이나영 본연의 매력으로부터 빚어진다. 8화에 등장하는 박하경의 학창 시절은 배우 박세완이 연기한다. 동그란 눈매가 영락없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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