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부러지는 2030이 시골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일본 고향세의 기적
  • 일본 진세키코겐정=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3.06.27 11:05
  • 호수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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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르포] 관치 논란 고향사랑기부제, ‘민간 적극 활용’ 일본 지자체에서 해법 찾다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의 인구 유입 정책에 호응해 지방으로 내려가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지금 서울에 사는 20·30대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우선 지자체들에 어떤 인구 유입 정책이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서울에 쏠린 일자리와 생활·문화 인프라를 뒤로하고 지방으로 내려갈 엄두는 좀체 나지 않는다. 결국 지방의 인구 소멸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지자체들의 노력도 헛바퀴만 돌고 있다.

심각한 수도권 과밀화 이슈를 한국보다 앞서 겪고 있는 일본은 어떨까. 실태를 들여다보기 위해 6월초 사회적기업 공감만세 관계자, 국내 전문가 등과 직접 일본을 찾았다. 일본도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소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오래도록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문제 해결은 요원한 게 사실이다.

6월8일 일본의 작은 지방자치단체 진세키코겐정 청사 앞에서 고향세 담당 공무원들이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시사저널 오종탁
6월8일 일본의 작은 지방자치단체 진세키코겐정 청사 앞에서 고향세 담당 공무원들이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시사저널 오종탁

진세키코겐정, 고향세로 희망의 불씨 지펴

그러나 미세하게나마 희망이 피어오르는 곳도 있다. 한국에선 아직 발견되지 않는 부분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진세키코겐정(神石高原町)이다. 진세키코겐정은 2004년 히로시마현 내 3개 정과 1개 촌(村)을 통폐합해 만든 지자체다. 정(町)이 한국으로 치면 읍(邑)이라지만, 진세키코겐정 인구는 올해 6월 현재 8100여 명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소멸 위기감이 높은 지역으로 손꼽히는 경상북도 봉화군(인구 3만여 명)의 봉화읍(1만여 명)보다 인구가 적다.

버스로 진세키코겐정에 진입해 청사까지 향하는 내내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드문드문 마을이 보였고 인적은 드물었다.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진세키코겐정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30년 이내에 소멸할 수 있는 지역으로 거론되다가 언젠가부터 타지에서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며 반전을 꾀하고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밀려났거나 고향이 그리워서 온 게 아니다. 탄탄한 자본에 강력한 ‘이주 명분’이 더해지니 연고도 없는 2030세대가 도시를 떠나 기꺼이 시골에 터를 잡았다. 이제 진세키코겐정은 최소한 소멸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꿈을 품게 됐다.

진세키코겐정 청사에서 만난 공무원들은 젊은이들이 유입된 기점이 고향납세제도(고향세) 도입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 정부는 젊은 세대가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지방에서 인구 소멸 위기와 세수 부족 현상이 불거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2008년 고향세를 도입했다. 출향인들이 자신들을 길러준 출신 지역에 기부하도록 유도하면 해당 지자체의 재정적 어려움이 해소되고 지역 균형발전도 도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향세 기부 금액이 한화로 연간 7조~8조원에 달한다. 한국에서 올해부터 시행한 고향사랑기부제가 바로 이 고향세를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고향사랑기부제는 모금 창구를 정부 플랫폼으로 일원화하고 기부금을 이용한 다양한 지역 사업 추진을 어렵게 만드는 등 단점을 노출하며 ‘관치(官治)’ 논란에 휩싸였다.(시사저널 1743호 《손흥민·BTS 동참한 고향사랑기부제, 왜 ‘관치기부’ 소리 들을까》 기사 참고)

일본 고향세는 애초에 민간이 사업을 기획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또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특정 창구에 구애받지 않고 편리하게 기부할 수 있도록 열어뒀다. 진세키코겐정의 경우 조례를 만들어 고향세 기부금을 자치 진흥이나 민간 비영리단체(NPO) 사업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진세키코겐정은 각 마을과 자치진흥회, NPO에 대한 기부도 고향세로 인정한다.

민간의 자율성을 보장하니 제도의 취지가 200% 달성되고 있다고 진세키코겐정 공무원들은 강조했다. 진세키코겐정의 지난해 고향세 기부금 모금액은 78억5646만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본 전체 1788개 지자체 중 250위에 해당한다. 이리에 요시노리 진세키코겐정장은 “NPO 등 민간과의 활발한 협업을 바탕으로 여타 지자체와 차별화되는 새로운 도전을 해왔다”며 “우리의 노력에 (출향인 등) 외부인들이 고향세 기부로 응원하며 재원을 뒷받침해준 덕에 다양한 사업 추진이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진세키코겐정에 있는 유기견 보호소와 ‘도그런’ 공간 등 피스완코 관련 시설들 ⓒ시사저널 오종탁
피스완코의 유기견 보호소 ⓒ시사저널 오종탁
일본 진세키코겐정에 있는 유기견 보호소와 ‘도그런’ 공간 등 피스완코 관련 시설들 ⓒ시사저널 오종탁
피스완코 시설 내에서 직원이 유기견을 이동시키고 있다. ⓒ시사저널 오종탁
일본 진세키코겐정에 있는 유기견 보호소와 ‘도그런’ 공간 등 피스완코 관련 시설들 ⓒ시사저널 오종탁
피스완코의 ‘도그런’ 공간 ⓒ시사저널 오종탁

‘유기견 프로젝트’에 젊은 인구 대거 유입

지금의 진세키코겐정을 있게 한 일등 공신은 단연 ‘피스완코’ 사업이다. 피스완코 사업은 NPO 피스윈즈재팬이 진세키코겐정을 거점 삼아 진행한 유기견 살처분 제로 프로젝트다. 오니시 겐스케 피스윈즈재팬 대표가 2010년 히로시마현 동물보호소 가스실에서 살처분되기 직전에 구조한 유기견 유메노스케를 3년여 동안 구조견으로 훈련시켜 각종 재해 현장에 투입하면서 피스완코 사업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2011년 기준 일본에서 한 해 살처분되는 유기견은 16만 마리에 달했다. 특히 진세키코겐정이 속한 히로시마현은 일본 광역지자체 중 가장 많은 8340마리였다. 피스완코 프로젝트가 시작된 2013년부터 살처분이 현격히 줄어들어 2016년 ‘0’을 달성했다. 이 경이로운 데이터는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피스윈즈는 진세키코겐정에 마련한 보호소에서 그동안 7600여 마리의 유기견을 보호했고, 절반이 넘는 3612마리를 입양 보냈다. 피스완코 사업에 연간 약 2만 명이 5억 엔(46억원) 이상을 기부하게 되면서 진세키코겐정은 유기견 보호의 상징적인 장소로 떠올랐다. 피스윈즈는 피스완코 프로젝트로만 지금까지 400억원 가까운 기부금을 모았다.

피스윈즈는 유기견 보호라는 목적 달성에 그치지 않고 보호소 옆에 ‘티어가르텐’이라는 이름의 유료 관광시설을 조성했다.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반려견을 데려와 같이 뛰어놀고 캠핑까지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반려인들의 명소가 되면서 고령 인구 중심이던 조용한 동네가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 피스윈즈는 피스완코의 고액 기부자들을 대상으로 1박2일 현장 투어도 진행하며 사업에 대한 이해 증진과 재기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이뤄가고 있다.

구니타 히로시 피스윈즈재팬 국내사업부장은 “유기견 보호라는 확고한 의미를 갖추니 일반 관광객은 물론 연예인과 정치인들의 방문도 줄을 잇는다”면서 “일본 내에 소멸 위기 지역이 많은데, 피스완코 사업같이 좋은 방책들을 고안해 내면 지역을 다시 활성화할 여지가 없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진세키코겐정에 실질적인 성과는 100여 명의 청년이 취업을 계기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올해 피스윈즈의 피스완코 사업부가 신규 채용한 인원만 22명이다. 실제로 보호소와 티어가르텐에서 유기견들을 관리하고 산책시키는 직원들은 대부분 20대 청년이었다.

피스윈즈재팬 피스완코 사업부는 홈페이지에 청년 직원들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소개해 놓았다. 자체 Q&A 코너에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라는 질문과 '고향세를 통해 지금까지 총 10만 명 이상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매월 자동이체로 기부하는 이도 3만3000명 정도 있다'는 답변을 명시한 점도 인상적이다. ⓒ피스완코 홈페이지
피스윈즈재팬 피스완코 사업부는 홈페이지에 청년 직원들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소개해 놓았다. 자체 Q&A 코너에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라는 질문과 '고향세를 통해 지금까지 10만 명 이상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답변을 명시한 점도 인상적이다. ⓒ피스완코 홈페이지

피스완코 사업의 성공은 인구 8100여 명에 불과한 진세키코겐정에 큰 자신감을 심어줬다.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새로운 관계 인구(특정 지역의 팬, 투자자, 상품 구매자, 아이디어 제공자 등 여러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꾸준히 지역 문제에 참여하는 외부 사람들)를 형성하는 기반이 됐다. 탄력을 받은 진세키코겐정은 다양한 목적사업 추진에 나섰다. 육아·청년 정주 지원, ‘아키아뱅크’(빈집은행), 원격의료 지원, 장학금·학교법인 지원 등이 여기에 속한다. 고향세 기부금이 없었다면 작은 시골 지자체로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사업들이다. 일본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라쿠텐과 명문 게이오대 등도 진세키코겐정과 고향세 사업에 관한 협업을 진행 중이다. 진세키코겐정의 좋은 평판과 높은 인지도, 민간과 숱하게 협력하며 다져온 네트워크가 이런 협업을 가능케 했다.

고향세를 통해 모인 기부금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업이 착착 진행되는 한편 답례품을 통해선 지역 경제에 활력이 돌고 있다. 일본 고향세도 한국의 고향사랑기부제처럼 기부자들에게 지역 특산품 등을 답례품으로 제공하게 돼있다. 진세키코겐정의 답례품 목록은 지역에서 생산한 쌀·포도·소고기·된장·젓가락 등이다. 진세키코겐정의 답례품 관련 NPO 니나의 우에야마 미노루 대표는 “7년 전 히로시마시에서 니시무라 유키란 20대 청년이 창업과 함께 이주해온 후 답례품의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며 “젊은 감각으로 답례품인 포도의 품질과 포장 디자인을 개선하고 답례품을 받은 기부자들의 피드백도 신속히 수렴하는 등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전했다.

7년 전 진세키코겐정으로 이주한 니시무라 유키(33) 부부(왼쪽)가 이곳에 오래도록 살아온 이웃 노부부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진세키코겐정 홈페이지
7년 전 진세키코겐정으로 이주한 니시무라 유키(33) 부부(왼쪽)가 이곳에 오래도록 살아온 이웃 노부부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진세키코겐정 홈페이지

히로시마에서 학습지 강사로 일하며 부업으로 인터넷 소매업을 하던 니시무라는 진세키코겐정과 라쿠텐이 포괄적 업무제휴를 맺는 걸 지켜보며 고향세에 관한 사업에서 기회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에야마 대표는 “고향세 기부금, 즉 자본이 돌고 있기에 젊은 사업가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라면서 “현재 니시무라가 (도시에 거주하는) 다른 친구들에게 진세키코겐정에 와서 사업을 하도록 설득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진세키코겐정도 일본 각지의 농업대학에 답례품 사업 현황과 이주 시 지원 프로그램 등을 홍보하며 젊은이들을 지역경제로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다. 젊은 층의 유입에 힘입어 진세키코겐정의 인구 감소세는 완만해졌다. 2015년 9217명에서 2020년 8250명으로 인구 감소세가 가팔랐다가 2년이 지난 지난해에 8283명, 올해(6월1일 기준)는 8129명으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다.

사가현 ‘1형 당뇨 네크워크’ 사례도 주목

‘꺾이지 않고’ 소멸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진세키코겐정의 사례는 일본의 다른 지역으로 번져나가는 모습이다. 핵심은 고향세 사업과 민간 활용이다. 이 중 일본 규슈 북서부에 위치한 사가현(佐賀県)은 최근 고향세 제도의 또 다른 모범 지자체로 주목받고 있다. 사가현은 고향세 기부금 모금 주체를 NPO뿐 아니라 봉사단체, 자치회, 부인회 등 다양한 조직을 포괄한 시민사회조직(CSO)으로 확대했다. 사가현에서 고향세 모금을 위해 활동 중인 CSO는 지난해 기준 113개이며, 이들이 모금을 위해 내건 사업은 130개다. 지난해 모금액은 83억원 수준이다.

사가현의 NPO ‘1형 당뇨 네트워크’가 추진한 사업은 피스완코처럼 흥행과 사회적 파급력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불치병인 1형 당뇨의 치료제 개발을 지원하는 이 단체는 2014년부터 사가현에 NPO로 등록하고 고향세 모금을 시작했다. 지난해까지 9년간 모금액이 71억8479만원에 이른다. 이와나가 고조 1형 당뇨 네트워크 대표는 “정부도 하기 힘든 일을 민간단체가 시민들 기부로 해냈다”며 “고향세를 통해 일본 국민이 함께 (공공 문제 해결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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