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시장적 정부 개입’ 비판하더니…거꾸로 가는 尹정부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23.06.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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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치’ 비판 확산에도 “공공재 성격에는 개입”
일각선 “尹정부 시장 개입 과도하다” 지적

윤석열 정부가 식품 물가 고공행진에 칼을 빼들면서, 라면 등 주요 업계가 가격 인하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고물가 상황이 지속되면서 서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자, 정부로선 ‘불가피하게’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같은 태도는 윤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이나 당선인 신분으로 내놓았던 ‘작은 정부’ 청사진과는 정반대의 행보라는 지적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자유 경제’를 강조하며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친기업적 스탠스를 보여 왔지만, 한편으로는 민간기업의 가격 인하 압박이나 지배구조 개선 요구 등으로 ‘관치’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일부 업계에선 정부의 시장 개입을 둘러싼 불안감이 퍼지는 모양새다.

윤석열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 이후 라면 업계가 대표 상품의 4~5%대 출고가 인하 결정을 내렸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 이후 라면 업계가 대표 상품의 4~5%대 출고가 인하 결정을 내렸다. ⓒ 연합뉴스

‘작은 정부’ 지향하더니 현실은 ‘큰 정부’? 

28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라면업계 1위 농심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출고가를 4.5% 인하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삼양식품도 12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4.7% 내리기로 했다. 오뚜기와 팔도도 가격 인하를 검토 중이다. 뿐만 아니라 제빵업계 1위인 SPC삼립도 가격 인하를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품업계 가격 인하 행렬이 이어지는 데에는 정부의 개입이 한 몫 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당국은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선봉장으로 기업에 가격 인하를 압박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내놓았다. 식품업계의 원자재 격인 국제 밀 가격이 크게 떨어진 만큼, 밀을 원료로 하는 식품업계부터 판매가를 조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공정거래위원회 차원의 식품업계와 제분업체 간 담합 조사 필요성까지 언급했다. 이에 라면업계는 이명박 정부 이후 13년 만에 라면 가격을 내렸다.

정부는 가격 인하 압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최근 들어 소비자물가는 3%대로 둔화했지만, 식품물가는 5%대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특히 라면이 포함된 가공식품 물가상승률은 5월 기준 7.3%다. 정부는 빠르면 7월께 소비자물가가 2%대로 둔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선 라면과 같은 생필품 가격을 조정해 물가 상승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정부는 공공재 성격이 강한 분야에는 적극 개입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월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공공재 성격이 강하고 과점 체제인 은행과 통신업계의 경쟁 시스템을 강화하라”며 제도 개선을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당국은 통신3사 불공정거래와 은행권 예대마진 담합 여부, 정유사 휘발유 도매가격 공개 확대, 포스코‧KT 등 민영화한 공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을 추진해왔다. ‘공정경제’를 추진하기 위한 불가피한 개입 조치라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지만, 해당 조치들은 ‘신(新)관치’라는 비판을 낳을 정도로 사사건건 논란에 휩싸였다.

라면 업계 1위인 농심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출고가를 4.5% 인하하기로 결정하면서, 라면값 인하 행렬이 다른 업체로 확산될 전망이다. 사진은 서울 시내 대형마트의 라면판매대 모습 ⓒ 연합뉴스
라면 업계 1위인 농심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출고가를 4.5% 인하하기로 결정하면서, 라면값 인하 행렬이 다른 업체로 확산될 전망이다. 사진은 서울 시내 대형마트의 라면판매대 모습 ⓒ 연합뉴스

정부 칼날 향할까 불안 떠는 기업들

문제는 ‘실적’이다. 정부의 강한 압박 발언에도 불구하고 식품업계의 실제 가격 인하 폭은 4~5%에 그치는 실정이다.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개당 50~100원이 내려가는 것으로, 개인이 매일 라면을 1개씩 먹는다고 가정해도 한 달에 1500~3000원을 아끼게 된다. 가격 인하 행렬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지 않는 한 실제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기업들의 표정은 복잡하다. 취임 초기부터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민간 주도 성장을 내걸었던 윤석열 정부가 민간 기업의 경영에 개입하는 게 혼란스럽다는 취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임원은 “공공재 성격에 정부가 어느 정도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경제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정부 개입이 과도해지는 전례를 보면 우려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시장경제 차원에서 정부의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고물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다 한국은 원래부터 정부가 시장경제에 관여하는 주요 플레이어였던 것을 고려하면 (정부 개입 조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도 서 교수는 “원가가 떨어졌는데도 가격을 내리지 않는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할 순 있으나, 상시적인 가격 통제 조치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물가 관리 자체는 정부의 역할이지만 개별 품목에 대한 가격 통제는 부적절한 조치”라며 “통화정책을 통한 물가 관리나 독점 경쟁 저지 혹은 통신‧은행 등의 공공재 성격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있을 수 있지만, 라면 등 식품의 가격은 시장의 경쟁으로 결정되는 게 바람직하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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