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워맨스로 일군 통쾌한 바다 액션, ≪밀수≫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8.04 15:05
  • 호수 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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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우정’이라는 핵심 동력 탄탄히 뒷받침한 김혜수·염정아 열연

시원하고 통쾌하다. 펄떡이는 활력을 앞세우며 여름 대작에 거는 기대감을 보란 듯이 채워주는 영화의 등장이다. 《밀수》는 2년 전 동시기에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가 최고조에 달할 무렵 《모가디슈》를 공개하며 360만 관객을 동원했던 승부사 류승완 감독의 신작이다. 올여름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한국 텐트폴 영화 중 가장 먼저 관객과 만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부터 신선한 소재, 시원시원한 액션까지 오락영화에 기대하는 거의 모든 것이 총망라된 가운데 바닷속이라는 배경이 진부함까지 틀어막는다. 한국 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인상의 활극이다. 

ⓒ(주)NEW 제공

1970년대 한국 바다를 만난 서부극 

《밀수》의 시작은 기사 한 줄이었다. 1970년대 일부 지역의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밀수》가 감독의 전작 가운데 《부당거래》(2010) 같은 사회파 드라마의 결을 입었거나, 《모가디슈》처럼 실화를 적극적으로 옮긴 작품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록에서 발견한 사실에 감독의 상상력을 더해 완성한 활극이다. 공간 배경 역시 가상의 어촌인 군천이다. 

영화는 지역 해녀들의 일상에 위기가 찾아온 때로부터 출발한다. 해산물을 건져 올리며 먹고살던 해녀들은 우후죽순 들어선 공장 지대의 폐수로 바다가 몸살을 앓자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게 조심스레 발을 담그기 시작한 분야가 밀수. 외항선들이 세관을 통과하지 않고 먼 바다에 던져 놓은 밀수품을 몰래 건져 올려와 돈을 버는 작전이다. 어려서부터 식모살이로 억척스럽게 살아온 춘자(김혜수)는 해녀들의 리더 진숙(염정아)을 설득해 밀수에 뛰어든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에는 그만한 위험이 뒤따른다. 돈 버는 재미를 조금 누릴 무렵, 한창 작업 중인 해녀들의 어선을 단속하기 위해 세관 공무원들이 출동한다. 누군가의 밀고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세관의 등장으로 허둥대던 진숙의 아버지와 동생은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고, 춘자만이 모두가 잡혀 들어갈 때 배에서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도망친다. 

자매 같았던 춘자가 밀고자라고 오해한 진숙이 이를 가는 사이, 몇 년 후 춘자는 전국구를 주무르는 밀수계의 큰손 권상사(조인성)와 함께 군천으로 돌아온다. 한층 커진 판을 위해서다. 해녀들을 따라다니면서 어업을 배웠으나 이제는 그들을 부리는 입장이 된 장도리(박정민)도 작전에 뛰어들고, 춘자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던 진숙도 어쩔 수 없이 가담한다. 

삶의 터전을 지키던 자가 소중한 이들을 잃고 키우는 복수심, 돌아온 탕아, 마지막으로 피할 수 없는 승부. 《밀수》에서는 이 같은 서부극의 기본 공식이 읽힌다. 흥미로운 건 변형의 방식이다. 전형적인 남성 대결은 춘자와 진숙의 구도로,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은 짠내 가득한 바닷가로 바뀐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캐릭터 무비의 재미다. 《베테랑》(2015) 등을 통해 점점 더 다수의 캐릭터를 주무르며 활용하는 방식을 선보였던 류승완 감독의 한 수다. 

실제로 초반 재미의 대부분은 다양한 캐릭터의 등장과 변화를 보는 데서 나온다. 한 식구처럼 지내다 각자의 이해관계로 뿔뿔이 흩어졌던 춘자와 진숙, 장도리는 다시 한자리에 모였으나 그 관계가 예전 같을 순 없다. 월남에서 살아 돌아와 잔혹하기로 이름난 권상사, 무언가 꿍꿍이를 감춘 듯한 세관 계장 장춘(김종수), 해녀들의 정보원 역할을 하는 다방 주인 옥분(고민시)까지 얽히고설키며 커진 판은 최종장을 향해 거침없이 굴러간다. 물론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의 진짜 무기는 총이 아닌 ‘물질’이다. 

영화 《밀수》의 장면들 ⓒ(주)NEW 제공
영화 《밀수》의 장면들 ⓒ(주)NEW 제공
영화 《밀수》의 장면들 ⓒ(주)NEW 제공
영화 《밀수》의 장면들 ⓒ(주)NEW 제공
영화 《밀수》의 장면들 ⓒ(주)NEW 제공
영화 《밀수》의 장면들 ⓒ(주)NEW 제공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해녀들의 액션 

땅 위의 영광은 힘 있는 자의 것이지만 바닷속의 지혜는 물길을 아는 자의 것이다. 인간의 탐욕뿐 아니라 어떤 자연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물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도생보다 협업이다. 결국 《밀수》는 믿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오해로 믿음을 저버렸던 춘자가 다시 진숙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며, 상대를 밀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맞잡은 손이 모두를 살리는 이야기다. 

장도리와 권상사로 대변되는 물 밖의 남자들이 돈과 욕망을 거칠게 좇을 때, 춘자와 진숙을 중심으로 한 물속의 해녀들은 어려움 속에서 함께 부둥켜안는다. 이들의 연대는 비린내 나는 꿍꿍이로 칭칭 감긴 세계의 비열한 밧줄을 끊는 힘이다. 춘자와 진숙, 해녀들과 옥분까지로 이어지는 불굴의 ‘워맨스’는 《밀수》의 핵심 동력이다.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마초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두 여성의 사투를 그린 버디 무비는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이후 두 번째다.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시원시원한 액션이다. 기존에도 기념비적인 액션 장면을 여럿 선보였던 류승완 감독이지만, 이번에는 배경 자체가 다르다. 물속에서 해녀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최후의 결투는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보지 못한 신선한 그림이다. 물 위의 싸움에서 타격감과 속도가 강조된다면, 해저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유연성과 넓은 공간 활용이 핵심이다. 영화 후반, 좁은 호텔 복도에서 벌어지는 남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결투와 해녀들의 물속 액션을 대비한 배치는 완전히 다른 양상의 리듬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제작진과 배우들은 기획 단계부터 수중 발레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고 움직임을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밀수》의 장면들 © (주)NEW 제공
ⓒ(주)NEW 제공

배우 자신의 표현대로 “적당히 상스러운” 춘자를 리듬감 있게 연기한 김혜수와 묵묵하고 강단 있는 진숙 역의 염정아가 좋은 대비를 이루며 든든하게 극을 받치는 사이, 조인성을 위시한 후배 배우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열등감 덩어리 그 자체인 장도리의 극적인 변화들을 소화한 박정민,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유머를 야무지게 겸비한 옥분 역의 고민시가 발군이다.  

 

■ 1970년대 명곡들의 향연 

《밀수》를 수놓는 재료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1970년대 대중가요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듣는 재미’ 또한 상당하다.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김추자의 《무인도》,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 류승완 감독이 직접 선곡한 명곡들이 적재적소에 포진돼 있다.  

특히 최헌의 《앵두》는 주인공들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장면에도 반복적으로 쓰이며 영화의 중요한 테마인 믿음을 정서적으로 상기시킨다. 그 시절 유행했던 가요들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도 알맞춤하게 영화에 녹아든다. 가수 장기하의 음악감독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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