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지금…국민이 선출해도 군부가 반대하면 ‘없던 일’
  •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7.29 10:05
  • 호수 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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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하고도 복잡한 태국 민주화의 길
군부-왕실-야권연합-親탁신 등 여러 세력 얽혀

태국 민주화의 길은 험하고도 복잡했다. 2014년 군부 쿠데타의 주역인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9년간 권좌를 지켜온 태국은 지난 5월 총선에서 승리한 민주 세력의 집권을 눈앞에 두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태국에선 3월20일 하원이 해산되고 5월14일 500명의 하원의원을 새로 뽑는 총선이 실시됐다. 75.22%라는 역대 최고 투표율에서 보듯 친군부 정권의 종식을 바라는 태국 국민의 열기와 정치 참여가 뜨거웠다. 총선에는 무려 67개 정당이 후보를 냈으며, 결과적으로 이 가운데 18개 정당이 의석을 얻었고, 10석 이상을 획득한 정당은 7개였다.

6월19일 발표된 결과는 예상대로 반군부 정당이 압승을 거뒀다. 1980년생 젊은 정치인인 피타 림짜른랏이 이끄는 전진당(MFP)이 예상을 뛰어넘는 선전으로 지난 선거보다 무려 70석이나 늘어난 151석(38.01%)을 확보해 제1당이 됐다. 전진당은 2019년 선거에서 81석을 얻었지만 2020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된 미래전진당을 실질적으로 승계해 탄생했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계열의 프아타이당은 지난 선거보다 5석 증가한 141석으로 제2당이 됐다. 전진당과 프아타이당 등 모두 8개 정당이 힘을 합친 야권연합은 이번 총선에서 하원 500석의 과반이 훌쩍 넘는 312석을 확보했다.

7월19일 태국 방콕 민주주의 기념탑 앞에서 전진당 지지자들이 헌법재판소의 피타 대표 의원 직무 정지에 반발하며 세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있다. ⓒEPA 연합
7월19일 태국 방콕 민주주의 기념탑 앞에서 전진당 지지자들이 헌법재판소의 피타 대표 의원 직무 정지에 반발하며 세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있다. ⓒEPA 연합

총선 승리한 피타, 상원 반대로 총리 불발

반면 201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보수·왕당·친군부 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PPRP)에서 나와 신당인 통일태국당을 창당해 선거를 치렀지만 36석 확보에 그쳐 제5당에 머물렀다. 116석의 집권 정당이던 PPRP는 의석이 반 토막 났다. 76석 줄어든 40석 확보로 제4당으로 몰락했다.

보수·왕당파 민간 정당인 품짜이타이당도 20석 감소한 71석 확보에 그쳐 제3당이 됐다. 이 정당은 아누틴 찬위라꾼 대표가 부총리 겸 보건장관을 맡으면서 쁘라윳 총리의 보수·친군부 연정에 참여했다. 이처럼 2023년 태국 총선은 2014년 이후 정국을 장악해온 군부 및 친군부 정당의 몰락과 반군부·민주화 정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로 요약할 수 있다.

국민이 의원을 선출하는 하원에서 야권 정당이 제1당을 차지하고 야권연합이 전체 의석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면 군부 주도의 정치를 끝낼 수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태국 정국은 순조롭지 못했다. 총선이 끝나자 혼란이 새롭게 시작됐다.

총리 선출 방식이 문제였다. 의원내각제에선 통상 제1당 대표가 다른 정당과의 연립을 주도하고, 전체 의석의 과반수를 확보한 연정을 구성한 후 의회 투표에서 총리로 선출된다. 하지만 태국의 총리 선출 방식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군부가 지명한 2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상원과 국민이 선거로 뽑은 500명의 하원 모두가 참가하는 상·하원 합동 선거로 총리를 선출한다. 전체 의회가 총리를 뽑는 이 제도는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이 민주화의 발목을 잡기 위해 만들어 놓은 ‘독수’인 셈이다.

7월3일 새 하원이 소집되고 4일 하원의장에 이어 13일 총리 선출을 위한 투표가 진행되자 군부가 설치해둔 ‘정치적 지뢰’가 즉각 작동했다. 총리 후보로 피타 전진당 대표가 단독으로 출마하면서 이뤄진 총리 선출 투표에서 상원의원 249명(1명 궐위)과 하원의원 500명 등 모두 749명의 의원 중 705명이 참가했다. 결과는 찬성 324명, 반대 182명, 기권 199명이었다. 피타 대표는 51명이 부족해 과반인 375명을 확보하지 못했다. 찬성표는 상원에서 13표, 하원에서 311표가 나왔다.

8개 정당으로 이뤄진 야당연합을 비롯한 반군부 세력이 똘똘 뭉쳤지만 군부가 임명한 상원의원 대부분은 물론 하원의 친군부 세력과 왕당파가 반대표를 던졌 때문이다. 피타 후보는 왕실모욕죄 폐지를 공약하면서 젊은 층의 지지는 모았지만 태국의 전통적인 친왕실 세력에게는 사실상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인물)’로 낙인찍혔다. 기권이 199명이나 됐다는 사실은 태국 정국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헌법재판소는 이날 제1당인 전진당 피타 대표의 의원 자격을 일시 정지했다. 태국 법률은 이해상충을 이유로 의원의 미디어 기업 지분 소유를 금지하는데, 피타가 케이블방송사인 ITV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ITV는 이미 2007년 3월 문을 닫았으며, 피타는 매각이 불가능해진 해당 주식을 상속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타 태국 전진당 대표가 7월19일 국회에서 헌법재판소의 의원 직무 정지 결정 소식을 듣고 고민에 빠져 있다. ⓒAP 연합

군부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귀국, 새 변수로

게다가 그의 왕실모욕죄 폐지 공약이 사실상 왕실을 모욕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면서 사태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불교국가 태국에서 군주는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신성불가침이며, 상당수 국민 사이에서 왕실은 숭배의 대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정 구성을 논의해온 야권 8개 정당은 피타 대표를 7월19일 다시 후보로 지명했다. 하지만 이날 의회는 표결 끝에 피타 대표를 이번 회기 내에 총리 후보로 다시 지명할 수 없도록 결정했다.

그러자 전진당은 태국 국민권익 구제기관인 옴부즈맨사무소에 진정을 냈다. 피타 대표를 총리 후보로 재지명할 수 없도록 한 의회의 결정이 위헌인지를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도록 옴부즈맨사무소가 요청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정치적 논란에서 시작된 피타 문제가 법률 문제로 비화했다. 태국판 ‘정치의 법정화’다.

옴부즈맨사무소는 “피타 대표의 총리 후보 재지명을 막은 의원들의 표결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다고 볼 수 있다”며 헌재에 위헌성 여부를 판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총리 선출 투표가 연기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부를 것”이라며 연기도 요구했다. 그러자 완 노르 마타 하원의장은 7월27일로 예정됐던 상·하원 합동 총리 선출 2차 투표를 연기하면서 사태는 일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전진당과 함께 야권연합의 핵심인 프아타이당에서 나왔다. 피타와 전진당을 배제하고 새로운 연정을 구성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일부 친왕실 보수정당이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하는 피타의 전진당이 포함된다면 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로 물러나 15년간 해외에서 지내온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8월10일 귀국한다고 그의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이 SNS에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7월26일 보도했다. 아직도 지지층이 두터운 탁신 전 총리가 귀국하면 프아타이당이 새롭게 정국을 주도할 수도 있다.

태국의 반군부 세력은 2023년 총선에선 승리했지만 친군부 세력은 물론 친왕실 세력과도 힘을 겨뤄야 하는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정치는 다양한 국민의 시각과 신념, 그리고 목소리를 모두 감안해야 하는 고난도 작업임을 태국 정치는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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