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폭염’이 바꾼 세계 노동 지도…한국판 ‘시에스타’ 논의될까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23.08.0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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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더위에 산업현장서 “휴게시간 보장” 목소리
‘폭염의 일상화’ 대비해 ‘근로시간 유연화’ 도입 논의도

살인적 폭염에 전 세계 산업 현장 곳곳에서 비명이 나온다. 50도를 육박하는 무더위 속에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근로 시간 중 휴게 시간을 보장하라는 목소리가 세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건설과 물류 등 폭염에 취약한 산업 현장을 중심으로 근로시간 조정 등 시도가 활발해졌다.

다만 나날이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면서 향후 ‘폭염의 일상화’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라, 일하는 방식 자체를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해외 일부 국가에선 더위가 최고조인 한낮에 휴게 시간을 보장할 수 있는 일명 ‘시에스타(Siesta)’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움직임도 일고 있다.

2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건설노조 폭염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폭염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 연합뉴스
지난 2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건설노조 폭염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폭염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 연합뉴스

폭염도 ‘중대재해’…“휴식 시간 적극 보장”

3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각종 건설 현장에서 최근 역대 최악의 폭염에 대비한 비상 대책을 가동했다. 연일 35도를 넘는 불볕더위에 근로자의 목숨이 위협받자 대책 마련에 분주해진 것이다. 체감온도가 35도 이상이면 옥외 작업을 중지하라는 당국 권고에 따라, 한낮 더위가 최고조에 달하는 오후 1시 이전까지 일을 마치도록 하거나 10~15분씩 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건설 현장뿐만 아니라 물류‧유통과 조선‧중공업 등 폭염에 노출된 각종 산업 현장 또한 근로자 보호를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납품 기일을 맞추지 못하더라도, 폭염이 지속되는 날엔 작업량을 대폭 줄이고 휴식 시간을 늘리는 식이다.

아예 공장 문을 닫는 곳도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8월 첫째 주 일주일 동안 전국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했고, 삼성중공업과 HD한국조선해양 등 국내 주요 조선사도 7월 말부터 8월 초중순까지 여름휴가 기간을 갖는다.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근로시간 조정에 나선 것은 무더위가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사례가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올해 폭염으로 벌써 23명이 사망했다. 지난해의 3배 수치다. 이미 지난 6월에는 대형 할인점인 코스트코 경기 하남점에서 쇼핑 카트를 관리하던 직원이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바 있다. 정부는 폭염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자칫하면 폭염이 경영상 리스크로 부각될 수 있는 터라, 다수의 기업이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전 세계적으로 최악의 폭염이 이어지면서, 야외 근로자 다수가 숨지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사진은 한 건설현장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머리에 물을 뿌리는 근로자들을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 ⓒ 연합뉴스
전 세계적으로 최악의 폭염이 이어지면서, 야외 근로자 다수가 숨지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사진은 한 건설현장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머리에 물을 뿌리는 근로자들을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 ⓒ 연합뉴스

“더울 땐 쉬자”…폭염으로 ‘근로시간 유연화’ 논의 탄력

전례 없는 폭염을 경험하고 있는 해외 다른 국가들 역시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한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현지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 등에선 폭염 속 노동 환경 개선을 촉구하며 파업에 동참하는 이들이 늘었다. 이들 지역은 최고 기온이 5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가 이어지고 있으며, 지난 7월 한 달 간 이탈리아에서만 근로자 5명이 폭염에 일하다 숨졌다. 이에 세계 각국에선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는 일부 야외 작업을 금지하라는 권고를 내리고 있다.

단순 권고 차원을 넘어, 기존의 ‘9 to 6’ 근로시간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향후 폭염이 더 심해질 것을 대비해 업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일에선 한낮에 2시간가량 낮잠 휴식을 갖는 남유럽 국가들의 전통인 ‘시에스타’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가장 더울 때 쉬는 대신 아침과 저녁에 일을 더 하도록 근로시간을 유연화하자는 게 골자다. 다만 근로시간 연장을 우려하는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시에스타’ 제도가 실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국내에선 일단 ‘폭염 속 작업 중지’와 ‘휴게시간 의무화’ 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논의에 착수한 상태다. 그러나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 상당수는 이미 지난 국회에서 발의됐던 터라, 이번에도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를 의식해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와 행정안전부는 당장 눈앞에 닥친 올해 폭염에 대비해 대응 수위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근로자 보호와 사고 예방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앞으로 이 같은 폭염은 일상이 될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UN(국제연합)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시대가 끝나고 ‘끓는 지구’(global boiling)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현재 기후변화 현상이 진행 중이고, 두려운 상황이며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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