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맏형’서 ‘수금 창구’까지…굴곡진 전경련의 역사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23.08.2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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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만에 ‘한경협’으로 이름 바꿔다는 전경련
‘정경유착’ 꼬리표 떼고 ‘싱크탱크’로 재출발 다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라는 이름이 5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전경련은 1961년 설립 당시 명칭인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꿔 달고 새 출발을 꾀한다. 김병준 회장 직무대행을 주축으로 환골탈태를 추진해 온 전경련은, 이제 류진 신임 회장을 중심으로 혁신을 이어나간다는 방침이다.

22일 전경련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어 한경협으로의 명칭 변경안을 의결하고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공식 선임했다. 새 명칭인 ‘한경협’은 전경련의 전신이자, 1961년 고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 등 기업인 13명이 설립한 단체의 이름이다. 회원사가 늘자 1968년 ‘전경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까지 사용해왔는데,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각오를 담고자 과거 이름을 55년 만에 부활시켰다. 최종 명칭 변경은 향후 산업통상자원부 인가를 거쳐 9월께 확정될 전망이다.

전경련은 ‘해체 수준의 강도 높은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 아래 자체 쇄신안을 추진해왔다. 혁신의 키를 쥐었던 김병준 대행은 6개월의 임기 동안 과거와의 단절과 정경유착 차단 등을 골자로 혁신안을 마련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류진 신임 회장은 ‘글로벌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를 목표로 전경련을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이다. 전경련은 이날 명칭 변경과 함께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 통합하는 안도 의결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경련 회관 앞 휘호석 뒷면에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 등 전현직 회장단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휘호석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당시 세워졌다. ⓒ 연합뉴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경련 회관 앞 휘호석 뒷면에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 등 전현직 회장단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휘호석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당시 세워졌다. ⓒ 연합뉴스

‘산업화 역군’에서 ‘권력 나팔수’ 되기까지

전경련은 지난 60여 년 동안 국내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며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했다. 특히 전경련은 1970~80년대 산업화 당시 경제 재건에 초석을 다진 단체로 평가받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나 울산공업단지 건설, 창원구로 수출산업공단 구축, 민간금융기구 설립, 기업의료보험 도입 등 굵직한 현안들을 추진하면서 재계의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또 전 세계 32개 소통채널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힘쓰면서 민간외교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와 가깝게 지낸 만큼 ‘정경유착’에 노출됐다는 점은 한계로 꼽힌다.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해재단 자금을 전경련이 주도적으로 나서 모금한 사실이 밝혀지는가 하면, 1995년에는 재계가 전경련을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외에도 전경련은 1997년 이석희 국세청차장의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세풍사건, 이른바 ‘차떼기’로 유명한 2002년 불법대선자금 사건 등에 연루되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전경련 탄생의 비화를 살펴보면, 전경련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가깝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부정축재를 이유로 기업 총수들을 잡아들였지만,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경제 재건에 이바지하겠다’는 조건으로 단체를 만들어 기업인 석방을 거래했다. 그렇게 만든 단체가 전경련의 모태인 한경협이다. 전경련의 탄생 배경 자체가 정경유착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정부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불가피한 셈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신임 회장으로 선임된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국경제인연합회 신임 회장으로 선임된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초심으로 돌아가겠다”…‘정경유착 과오’ 극복 의지

전경련을 둘러싼 ‘정경유착’ 오명의 정점은 2016년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전경련이 K스포츠와 미르재단을 위한 기업 후원금 모금을 주도한 사실이 드러나 정경유착의 고리로 낙인찍히면서다. 이 사건을 계기로 4대 그룹(삼성‧SK‧LG‧현대차)을 비롯한 100개 계열사가 일괄 탈퇴하면서 전경련의 위상은 급속도로 추락했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에는 주요 정부 행사에서 모조리 배제되는 이른바 ‘패싱 굴욕’을 겪기도 했다.

전경련에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윤석열 정부 집권 이후다. 공석이던 전경련 회장직을 대행할 인물로 윤 대통령과 가까운 김병준 대행이 내정되면서다. 재계 인사가 아닌 학자나 정치인 출신이 직무대행을 맡은 사례는 전경련 설립 이후 처음이다. 김 대행 합류 이후 전경련은 지난 6개월간 혁신안을 추진했고, 그 결과가 이날(22일) 한경협으로의 재출발이다. 김 대행은 이날 임시총회에서 “회장직이 넘어가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벼워졌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제 류진 신임 회장 체제로 재탄생하는 전경련 앞에 놓인 1순위 과제는 정경유착 꼬리표 끊어내기다. 이와 관련해 류 신임 회장은 “전경련의 최상위 과제는 국민 신뢰 회복이다. 부끄러운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고 과감하게 변화하지 못한다면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며 “윤리경영을 실천하고 투명한 경영 문화가 경제계 전반에 뿌리내리도록 솔선수범하겠다”고 말했다. 또 류 회장은 “경제계를 대표하는 글로벌 싱크탱크로서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적 대안을 만들겠다”면서 “어두운 과거는 청산하고 잘못된 꼬리를 잘라내겠다”고 강조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신임 회장으로 선임된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임시총회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국경제인연합회 신임 회장으로 선임된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임시총회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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