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도 미성년 주식 부자는 늘어났다
  • 김경수 기자 (2ks@sisajournal.com)
  • 승인 2023.12.05 10:05
  • 호수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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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주식 부자 1위는 KCC 4세 정한선
대한제강·에스엘·고려아연·효성家 뒤이어

한국 주식시장이 심상치 않다. 내년에도 1%대 저성장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요 국제 투자은행(IB)의 비관적인 전망이 나온다. 일본, 중국, 홍콩 등 아시아 증시도 일제히 하락세다. 경기 침체 장기화 우려가 깊어지는 대목이다. 일제히 하락세를 보인 배경에는 미국 국채 금리 급등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주요 기업 총수들의 20세 미만 자녀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는 크게 상승했다. 상위 20위에 속한 이들이 보유한 평가액은 505억500만원이다. 전년(336억1900만원) 대비 66.53%나 증가했다.

ⓒ시사저널 최준필

10억 이상 자산 보유한 미성년 부호 16명

이 같은 사실은 시사저널이 최근 기업 분석 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의뢰해 국내 500대 기업 오너 일가 1614명의 주식 가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상위 50위권 미성년 주식 부자 평균연령은 13세다. 1인당 평균 자산은 12억원이다. 조사 대상자 중 10세 미만 영·유아는 13명이다. 전년보다 7명 늘어났다. 이들의 평가액은 104억3700만원이다. 최연소 주식 부자는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겸 (주)LS 이사회 의장의 손자인 구건모군(9개월)이다.

올해 미성년 주식 부자 1위는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의 아들 정한선군(16)이 차지했다. 2년 연속이다. 한선군은 2017년 말 고(故) 정상영 KCC 명예회장으로부터 KCC와 코리아오토글라스 지분을 증여받았다. 2020년에는 정몽진 KCC그룹 회장으로부터 KCC글라스 지분을 추가로 증여받았다. 11월10일 기준 한선군의 평가액은 85억6000만원이다. 1월10일(79억2500만원) 대비 주식 가치가 8% 상승했다.

미성년 주식 부자 2위는 부산에 기반을 둔 대한제강 오치훈 사장의 아들 오준환군(15)이다. 평가액은 58억4700만원으로, 이승훈 에스엘미러텍 사장의 장녀 이정민양(19)을 제치고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정민양은 3위(42억4800만원)로 밀려났다. 미성년 주식 부자 4, 5위는 최창영 고려아연 명예회장의 외손자 이승원군(18),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의 차녀 인서양(17)이 각각 차지했다. 이들의 평가액은 33억600만원, 29억4200만원이다.

시사저널은 2014년부터 관련 조사를 진행했다. 오너 일가의 주식 평가액이 그해 기업의 실적이나 주가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30대 그룹 오너 일가만 조사 대상이었지만, 지난해부터 조사 대상을 500대 상장기업으로 확대했다. 그러자 그간 1위를 유지했던 주요 기업 3세나 4세들의 순위가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대신 언론에 자주 노출되지 않던 중견기업 오너가 3~4세들이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미성년 주식 부자가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무엇보다 재계는 최근 3, 4세 체제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자녀가 어릴 때 회사 주식을 증여해 승계 부담을 줄이는 게 트렌드가 됐다. ‘부의 양극화’도 가속화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미성년 주식 부자 상위권 5명의 평가액은 모두 204억9030만원이다. 나머지 45명의 평가액을 합한 금액(305억9300만원)의 3분의 2 수준이다.

올해 주식 가치가 가장 많이 상승한 인물은 대한제강 가문의 오준환군(15)이다. 준환군의 주식 가치는 1월(49억9100만원) 대비 17.16%나 상승했다. 대한제강은 이제 막 3세에서 4세로 지분 승계를 시작했다. 추가적인 지분 증여도 예상된다. 준환군을 포함해 상위 5위권 미성년 주식 부자의 평가액이 모두 증가했다. 미성년 주식 부호들은 대부분 증여로 재산을 증식한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로 양홍석 대신증권 부회장은 최근 두 딸인 채유(10)·채린양(7)과 조카인 홍승우군(4)에게 자금 증여 방식으로 주식을 증여했다. 이번 조사에서 세 사람의 주식 가치는 1월보다 각각 7.82% 상승했다. 대신증권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입한 것이 효력을 봤다. 효성가의 행보도 눈길을 끈다. 조현준 회장의 장남 재현군(11), 차녀 인서양(17)과 조현상 부회장의 자녀 인희양(14)·수인양(11)·재하군(8)의 주식 가치도 같은 방식으로 18.46%, 8.76%씩 상승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겸 (주)LS 이사회 의장의 첫 손자인 구건모군(9개월)은 태어나자마자 E1 지분을 받았다. 구동휘 LS일렉트릭 비전경영총괄 대표의 아들로, 올해 2월 태어나 최연소 미성년 주식 부호가 됐다. 건모군의 평가액은 7900만원이다.

미성년 주식 부호 대다수가 증여로 재산 증식

하락장을 이용한 주식 증여도 눈길을 끈다. PCR(유전자증폭) 진단 시약업체인 씨젠이 대표적이다. 씨젠은 2020년 PCR 기반의 코로나 진단키트로 대박을 쳤다. 그러다가 엔데믹 국면에 진입하면서 실적 하락과 함께 주가가 급락했다. 장기 하락 추세에서 좀처럼 못 벗어나고 있다. 천경준 회장은 큰 결단을 했다. 올해 초 딸들을 건너뛰고, 외손주 7명에게 각각 28억원어치씩 주식을 똑같이 나눠졌다. 적게는 3세에서 많게는 17세로 구성된 이들은 씨젠 주주명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조부모가 손주에게 직접 증여하는 것을 ‘세대생략증여’라 한다. 세대를 건너뛰면 증여세를 한 번만 내면 되기 때문에 할증해 더 걷는다. 할증과세다. 통상적으로 산출세액의 30%다. 다만 미성년자가 20억원 넘게 물려받으면 40%가 붙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곱지 않은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엄두도 내기 힘든 거액의 주식을 갓난아기에게까지 안기는 기업의 행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행보를 세금과 연결 지어 해석한다. 김기흥 경기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절세 측면에서 기업 이익을 위한 오너 일가의 한 발 더 나아간 주식 증여 행보라고 볼 수 있다”며 “우리나라 상속세, 증여세는 OECD에 비해 높다. 누진 할증과세로 방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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